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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Aug 21. 2022

파이 페이스 2.

나는 커피 만들기를 즐겼다.


호주에서 풋볼은 종교와 같다고 한다. AFL(Australian Football League)이 시작되는 3월부터 결승전이 있는 10월까지 경기가 있는 저녁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파이 페이스에 몰렸다. 우리 매장은 풋볼 경기장인 에티하드 스타디움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근무를 시작하는 10시 즈음이 경기가 끝나는 때였고 군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시간에 문을 연 곳이란 파이 페이스와 그 옆 헝그리 잭스뿐이었다.

한 번 러시아워가 시작되면 준비해둔 음식들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람들은 파이와 소시지 롤을 미친 듯이 먹었고 커피와 핫 초콜릿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마셔댔다. 3월에서 10월은 가을과 겨울이었고 경기장에 몇 시간을 앉아있던 사람들은 따뜻한 음식을 찾았다. 맛이나 서비스의 질을 갖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먹을 게 있음에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음료 주문이 밀리면 나는 에스프레소를 줄줄이 내려놓고 대형 피쳐에 우유를 콸콸 부어 스팀기를 꽂았다. 커피를 제대로 만들려면 작은 피쳐를 써서 우유의 온도와 거품을 조절하며 정성스레 끓여야 했지만 그런 걸 할 때와 아닐 때가 있었다. 나는 피쳐 가득한 우유에 스팀기를 틀어둔 채 다른 일을 했다. 허겁지겁 음식을 준비하다 다시 우유로 돌아와 보면 대충 적당하게 스팀이 됐고 에스프레소에 냅다 부어 커피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만든 것도 군말 없이 마셨다.

파이 페이스에서 파는 거의 모든 식품들은 냉동으로 배달이 됐다. 파이와 페이스트리는 물론이고 샌드위치 용 빵과 치즈 케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달걀도 완벽한 원형으로 미리 조리가 된 채 얼려서 왔고 그걸 녹여서 베이컨과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면 ‘Eggs and Bacon Breakfast Sandwich’라는 명색 좋은 메뉴가 됐다. 그래도 오븐에서 갓 구운 페이스트리의 맛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이와 빵이 막 구워졌을 때 먹은 사람은 생각보다 맛있다며 놀라곤 했다. 반면 진열대에서 12시간을 묵은 인기 없는 파이를 고른 사람은 두 번 다시 파이 페이스를 찾는 일이 없었다.


레고로 만든 AFL 경기장.


밤 근무가 끝나면 아침에 교대하는 사람은 제시카나 지아였다. 제시카는 호 다음으로 일을 가장 오래 했는데 호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녀와의 시작이 안 좋았다. 처음 며칠 일이 익숙지 않을 땐 밤새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작업들을 보고 제시카는 신경질을 냈다. 아침에 갑자기 몰려드는 커피도 만들지 못하자 제시카는 그냥 집에나 가라며 짜증을 냈다.

지아는 나와 동갑인 한국인이었다. 지아가 아침에 나오는 날이면 나는 호에게서 받은 설움을 털어냈다. 지아도 똑같이 겪어봤다며 내 말에 다 맞장구를 쳐줬다. 매니저 욕하는 재미에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고 나는 퇴근도 안 하고 남아서 수다를 떨었다. 호는 제시간에 나오는 적이 거의 없었다. 출근 인파가 잦아들면 그제야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나거나 아예 일을 거르기도 했다. 잘 맞는 사람과 일을 하면 파이 페이스는 어려운 게 없었고 재밌기까지 했다. 나는 커피 만드는 일이 좋았다. 주문지를 보고 거기에 맞는 커피를 만드는 일은 작은 성취감까지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내릴 때 기계가 웅웅 거리는 소리, 우유를 끓일 때 나는 스팀기의 요란한 고음과 피처 안에서 만들어지는 소용돌이, 우유 섞은 커피의 밝고 선명한 갈색 모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든다는 일의 즐거움이었다. 지금도 종종 카페에서 일하는 게 그립곤 하다. 

지아에게는 제시카 욕도 했다. 어려 보이는 게 건방지다고(나이가 무슨 상관이라고…) 했더니 지아는 제시카도 알고 보면 귀여운 동생이라고 했다. 제시카도 한국인인 걸 처음 알았다.

다시 제시카를 만났을 땐 서먹했다. 그러나 곧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제시카는 조잘조잘 말도 많아졌다. 치위생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영주권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제시카는 곧 나가게 될 실습을 걱정했다. 제시카가 사는 곳은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층 아파트였는데 같이 사는 친한 언니가 가끔 참을 수 없는 짓을 한다며 흉을 봤다. 빨래를 하면 옷을 탁탁 털지 않고 그대로 넌다고 했다. 특히 두꺼운 후드가 잔뜩 구겨진 채로 건조대에 널린 모양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기가 펴줘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쭈글쭈글한 후드가 걸려있는 모양을 토끼 앞발처럼 양손을 모아 표현하는 게 우스워 나는 한참을 깔깔댔다.

지아도 룸메이트에 대해 불만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습관에 기가 막혔던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빨래를 하려고 세탁기를 열어보니 룸메이트는 수건 달랑 하나를 빨고 있었다며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우린 입을 모아 말했다.

새로 들어온 밤 직원 하십으로 말하자면 이야깃거리가 마를 날이 없었다. 아침에 나와보니 매장에 크로와상이 가득해서 왜 그렇게 많이 만들었냐 물었더니 자기가 가져갈 거라고 했다. 50프로 직원 할인으로 사간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라는 방침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재고를 털어 빵을 구워가는 꾀에 기가 막혔다. 하십은 일하면서 핸드폰을 켜 두고 밤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곤 했다. 아마도 자기 나라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손님이 오면 잠깐 일을 하다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택시나 우버를 타면 기사들이 종종 그랬다. 스피커를 켜 두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통화를 했다.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불쑥 말을 꺼내면 나는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대답했다가 민망해지곤 했다. 긴 침묵이 흐르다 또 뭐라 하는 소리에 정신을 돌리면 어김없이 스피커에 대고 하는 소리였다.

이 세상엔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넋풀이로 언제나 같은 마무리를 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하지만 상식이란 게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상식이란 단어도 모순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동안 만나왔던 미친 룸메이트들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옳은 것은 우리였다고 서로를 확신해주며 결속을 다졌다.



경기장에서 나오는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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