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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Sep 04. 2022

멜버른 빅토리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한 학기만 하고 떠날 수는 죽어도 없었다.

St. Kilda 세인트 킬다 부두가에서

세바스찬과 홍보 영상을 만들었을 때 나는 상상도 못 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대학교에서 받는 시급은 약 30불이었다. 편집에 몇십 시간을 보냈으니 프로젝트를 마무리했을 땐 거의 천불에 가까운 돈을 받았다. 같이 몇 번을 일하고 나자 학생회에는 내가 영상 전문가라는 인상이 심어졌다. 세바스찬은 계속 영상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다른 부서 직원들도 영상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작업들이 이어졌다.

나와 세바스찬은 미디어 팀에 속했다. 팀장, 소셜 미디어(세바스찬), 그래픽 디자이너로 이뤄진 부서에서 비디오그래퍼인 내가 추가가 됐다. 없던 직책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가 프리랜서에서 파트타이머로 고정이 된 데에는 학생회의 구조가 바뀌며 혼란스러웠던 덕도 있었다. 학생회의 가장 큰 보스가 갑자기 잘렸고, 미디어 팀장도 두 번이나 바뀌며 어수선할 때였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비디오그래퍼라는 자리가 원래 있던 것쯤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요즘 시대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의 새 팀장으로 들어온 나탈리는 영상에는 아는 것이 없다며 오히려 내게 크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셜 미디어의 대명사와 같은 페이스북은 어느새부턴가 사람들의 휴가 사진이나 단상을 올리는 곳에서 광고나 뉴스를 보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글보다는 그래픽이나 영상의 중요해지며 그래픽 디자이너와 영상 제작자들의 수요가 많아지고 있었다. 나에겐 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기본적 지식만 있었지만 어쨌든 영상 몇 개는 완성을 했으니 비디오그래퍼란 타이틀이 주어진 것이었다.

일은 일주일에 겨우 이틀 정도 나갔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시급은 파이 페이스의 두배니 파이 페이스에서 나흘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행사가 많아지는 기간이 되면 4, 5일을 나가거나 주말에도 일을 했다. 주말에 일하는 게 최고였다. 잠깐만 일해도 큰돈을 벌었다. 주말이라고 만날 사람도 없었고 따로 갈 곳도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일은 익숙해졌지만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는 건 대단히 불편했다. 아직도 영어로 말하는 게 어려웠고 그게 '직장'이라는 부담까지 있어서 더욱 말을 가리게 됐다. 강한 한국 억양도, 서툰 구사력도 부끄러웠다. 안 그래도 조용한 나는 더욱 말을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히도 내겐 세바스찬이 있었다. 세바스찬의 주도 아래 묵묵히 일만 함으로써 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교환학기는 빠르게 지나갔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었다. 지금 가면 아깝게 놓치는 것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영상 일을 하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호주의 삶이 좋았다. 나는 언제나 외국에 살 거라고 막연한 동경을 해왔었다. 그게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걸 붙들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주에 남아야 했다.

학교를 아예 여기로 옮길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을 택했다. 같이 살던 베트남 룸메이트의 얘길 들어 보니 자신도 그렇게 멜버른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며 찾아가 보라고 했다. 베트남 인 변호사였다. 호주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방법을 대충 설명 들었다. 일을 진행하려면 선임비로 몇천 불을 내야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다. 학교 등록금까지 더하면 만불은 족히 넘었다. 다시 태어나도 내게 그런 돈은 없었다.

한 번만 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한국인 유학원을 찾았다. 거기서 설명하는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어떤 서류를 언제까지 준비하고 제출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뜻밖에도 내가 유학원에 따로 내야 할 돈은 없었다. 나는 입학금만 준비하면 됐다.

유학원들은 학생들로부터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유학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설명해 줬다. 그들은 외국인 학생들을 입학시켜 주는 대가로 학교에서 커미션을 받았다. 외국인 학생들이 학교에 내는 돈은 엄청났고 학교는 유학원들이 소개해 주기에 따라 입학생의 수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변호사한테 돈을 줬거나 거기에 절망하고 포기부터 했으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그러나 등록금은 여전히 등록금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돈은 턱없이 모자라서 한국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다행히 부모님도 내게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이해했다.

정부에서 환급받은 세금도 도움이 됐다.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들은 세금을 훨씬 많이 내는 대신 환급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저축을 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파이 페이스에서 일한 건 당연히 세금 기록이 없었지만 그간 학생회에서 일하고 돌려받은 세금이 예상치 못하게 많았다.

돈만 있다면 대학교에 입학하고 학생 비자를 받는 것은 아주 쉽다. 호주가 유학생들로부터 버는 돈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호주 국가엔 큰 돈줄이다. 등록금만 낼 준비가 됐다면 모두가 총력을 동원해 입학을 도와준다. 호주 자국민 학생들은 대부분 정부의 보조금으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현금을 쏟아붓는 것은 오로지 외국인 학생들이었다.


나는 연극 영화 과와 가장 비슷한 학과인 커뮤니케이션 과에 들어갔다. (이는 나중에 스크린 미디어 과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 20살 애들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들까지 다양했다. 결혼하여 가정이 있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았고 할아버지라고 부를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영상이나 영화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다.

수업을 주도하는 것은 단언 백인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침없는 자기주장으로 토론에 활발히 참여했고 강사들의 이목을 독차지했다. 호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좋다, 싫다, 하는 것은 누가 묻지 않아도 말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한국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토론하는 수업을 들으면 거의 침묵으로 일관되다시피 하다 끝났다. 시나리오 창작 수업이 그랬다. 서로의 글을 읽고 합평을 해야 했는데 모두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고 강사는 그런 우리에게서 한 마디라도 끄집어내느라 매번 욕을 치렀다. 자기 시나리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이 쓴 걸 얘기하는 건 더욱 어려웠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걱정과 내가 뭐가 잘나서 남의 창작물을 비평하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정한 예술인이란 말이 아니라 작품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강했던 것 같다. 말이 많을수록 실력은 없고 속은 얄팍하다고 보곤 했다.

호주 사람들은 정반대의 입장인 것 같았다. 자기 생각 말하기에 훨씬 편해 보일 뿐 아니라 뭔가를 ‘love’한다거나 ‘hate’한다는 표현도 곧잘 썼다. 친구나 동료들과 모여 점심을 먹거나 주말에 뭘 했는지 얘기하는 자리가 있으면 화제는 곧 서로가 먹는 음식이나 주말에 본 티브이 쇼에 대해 이루어졌다. ‘I love chips’’라든지 ‘I hate lettuce’로 자기 입맛 얘길 하거나, 어떤 드라마에 나온 배우가 너무 좋거나 싫다는 등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음식 얘기 중에서도 호주 사람들이 특히 열을 올리는 종목들이 있었는데 땅콩버터가 그중 하나였다. 땅콩 덩어리가 씹히는 crunchy 타입과 덩어리가 없는 smooth 타입 중 어떤 게 더 좋냐고 화두를 던지면 모두가 하던 일을 손에서 놓고 열띤 주장을 펼쳤다. 파인애플 토핑 피자 찬반 의견을 물어도 마찬가지다. 파인애플이라는 과일이 피자라는 음식에 올라가는 게 말이 되냐는 편과 맛있으면 그만이라는 편으로 갈려 밑도 끝도 없는 설전이 오갈 것이다. 땅콩버터나 파인애플 피자 미끼는 어색한 자리에서 침묵을 깨는 데도 즉효였다.

좋고 싫은 게 뚜렷하고 그걸 목소리 높여 말하는 게 개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문환 것 같았다. 둘 다 좋아한다거나 별생각 없다고 했다간 줏대 없는 취급을 당했다. 땅콩버터는 어느 쪽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가 한 동료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Don’t sit on the fence. You get splinters.”울타리에 앉으면, 즉 중립을 취하면 엉덩이에 가시가 박힌다는 표현이었다.

좋다고 난리를 치거나 싫다고 호들갑을 떠는 게 미덕인지는 여전히 확신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땐 논술을 공부하며 두 입장 중 하나에 동의하고 다른 쪽을 비판해야 한다고 배웠다. 토플 공부 때 역시 하나의 입장을 택하고 그게 왜 옳고 다른 쪽은 그른지 주장을 펼쳐야 했다. 내가 처음에 했던 실수는 두 입장에 서서 장단점을 비교한 뒤 나은 쪽을 택하는 것이었다. 논술과 토플에선 그걸 시간낭비로 봤다. 어느 게 더 타당하고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정부터 하고 근거는 만들어 내면 됐다. 결정하는 시간을 없애야 뒷받침하는 이유를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고 점수도 잘 받을 수 있었다.

논술과 토플의 이런 방식이 자기 의견 표현의 훈련이라는 것임에는 동의를 한다. 외국에서 살려면 중요한 자질이었다. 수업에도 참여해야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과제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에세이에 문법을 너무 많이 틀려 감점을 받으면 내게는 불리한 처우라고 변호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과 말이 너무 쉬운 것은 다르다고 믿는다. 호주 사람들은 (혹은 감히 말하건대 서양인들은) 그런 점에서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사람의 깊이도 금방 드러난다. 예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단 일곱 단어만 말하는 걸 갖고 대학교육을 받았는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말로 수준을 알기가 그렇게 쉽다. 나는 그게 두려워서 말을 아끼는 것이기도 했다.

스크린 미디어 수업시간에는 종종 영화 얘기가 나왔고 그럴 때면 학생들은 새로 나온 마블과 DC 코믹스 영화에 대해 앞다퉈 떠들어댔다. ‘I love’로 운을 떼어 스파이더맨과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분석하며 어떤 시리즈가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지 정신없이 얘기했다. 이들에게 영화란 곧 슈퍼히어로 물이었고, 고전이란 심슨가족과 스타워즈였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유치했다. 내게 아직도 ‘영화학도'란 허세가 남았는진 몰라도 코믹북 영화를 가벼운 오락물 이상의 수준으로 진지하게 여기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마치 중세 건축양식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롯데월드 매직캐슬 견학을 가는 꼴이었다. 잠자코 있는 게 왜 오히려 이로운지 그럴 때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대신 말을 안 하면 속에 쌓이는 게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나는 일기를 썼다. 좋다 싫다 말하지 못하고 마블 영화 담론에 끼지 못해 답답함이 커지면 나는 노트북을 켜고 일기장을 열었다. 오늘은 또 누가 시시껄렁한 영화평으로 수업을 장악했고, 누가 개인적 얘기로 강사와 토론하느라 모두의 시간을 낭비했는지 욕을 했다. 그게 나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날의 일기장을 들춰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활이 힘들고 굴곡이 많을 때 글이 가장 많이 쓰인 걸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인생이 쉬워지면 공백이 생겼다.

그렇다고 말없는 사람들이 모두 일기를 쓰는 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로 향해 밑도 끝도 없는 지꺼부레기 소리를 쏟아냈다. 할 말은 많고 청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한해 보이는 가상의 공간이 가장 쉬운 무대 같았다. 나도 그랬다. 몇 번을 해보고 얼마나 덧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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