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가가로 대동단결한 우리
말없는 사람들의 다른 공통점은 가끔 말을 할 때 더욱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다. 학생회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색한 존재였다. 무표정, 무언의 외국인 학생이 영상을 만든다고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그 안에 있기가 불편해서 나는 세바스찬이 일을 나가는 날만 따라 나갈 정도였다.
그래도 어쨌든 사람들과 소통은 해야 했고 어울려야 했다. 어떤 동료들은 일부러 더 말을 걸어줬고 그 덕에 나도 조금씩 마음과 입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대화에 끼려고 내가 어렵사리 말을 던지면 사람들은 종종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전혀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나를 엉뚱하게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취급이 낯선 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얌전하던 내가 가끔 입을 열면 어른들은 나를 맹랑하다며 혼을 내거나 귀엽게 봤다. 내가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 있다. 이모부가 내게 잔소리를 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나를 뭐라 꾸중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이모부에게 던진 말만은 생생하다. “이모부는 이모부 인생대로 사세요. 나는 내 인생대로 살 테니까.”
그걸 갖고 우리 가족들은 내가 그렇게 당돌했다며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얘기를 한다. 교회 장로님이셨던 이모부는 고지식함이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가족들은 내 직설을 은근히 통쾌히 여겼던 게 분명했다.
10대, 20대가 돼서도 나는 계속 그런 인물이었다.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얘기를 했다. ‘4차원'이라든지, ‘보기보다 엉뚱하다'든지, ‘자기만의 세계에 산다'는, 욕도 아니지만 칭찬도 아니고 그저 남의 성격을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하등 도움되지 않는 촌평이었다.
학생회 동료들에게도 나는 그런 인상을 줬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걸로 끝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를 웃기게 봐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이들과 친구가 됐다.
세바스찬 다음으로 친해진 사람은 그래픽 디자이너 디안드라 Deanndra 였다. 학생회 본부는 본교 캠퍼스인 풋츠크레이에 있었지만 미디어팀 사무실은 멜버른 시내 분교에 있었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거기로만 출근을 했다. 팀장의 사무실은 따로 떨어져 있어서 우리 사무실엔 언제나 나와 세바스찬과 디안드라뿐이었다. 그마저 세바스찬이 없으면 나와 디안드라만이 말없이 앉아 일을 했다. 아침에 “Hi” 하면 저녁에 “Bye”가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그렇게 어색하게 며칠을 지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내가 음악을 틀겠다고 했다. 퇴근 즈음이라 흥을 돋우고 싶었다. 유튜브로 레이디 가가의 뮤직비디오를 찾았다. 곡은 비욘세 피쳐링의 'Telephone'이었다.
인트로가 꽤 긴 뮤직비디오였다. 레이디 가가가 감옥에 들어가는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첫 몇 분은 효과음과 대사만이 들렸다.
디안드라가 말했다. “Is this Gaga?”
본 노래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맞춘 것이었다. 그 정도로 디인드라는 가가의 뮤직비디오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그런 음악을 좋아할 줄 몰랐다며 웃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같이 커피도 마시고 점심도 먹는 사이가 됐다. 디안드라는 미적 감각이 남다른 친구였다. 그녀가 만드는 그래픽도, 입는 옷도 스타일과 정체성이 있었다. 유머 감각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던 것 같다.
디안드라는 어릴 때부터 예술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보간 Bogan의 운명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보간이라는 호주 속어는 뜻을 찾아보면 ‘문화 수준이 낮은 사람' 정도의 풀이가 있다. 쉽게 말하면 ‘촌놈'이었다. 호주의 촌놈들이란 어떤 사람인지 처음엔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세계 최고 선진국에 막 입성한 나에겐 모두가 잘나 보였다. 그들이 입고, 먹고, 말하는 방식을 무조건 선망했다.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보면 다 똑같이 생겨 구별을 못하겠다고 하는 것처럼, 나도 호주의 백인들을 하나로 뭉뜽그러진 집단으로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떤 이들을 보간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고, 먹고, 말하는 방식이 크게 달랐다. 일단 복식문화를 보면 계절이나 상황을 무시하고 한결같은 차림이라는 점이 있었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반바지에 플립플롭만으로 돌아다니는 게 보간들이었다. 반바지도 꼭 수영복 반바지나 보드 반바지를 입었다. 호주에선 수영복이 일상복 수준이었다. 그러고 학교도 가고 다 했다. 맨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슈퍼마켓에서 많이 보였는데 집에선 어차피 맨발로만 다니다 차를 몰고 왔기 때문에 뭘 신을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발바닥이 웬만큼 단련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바닥에 밟히는 온갖 것들이 아프기도 했지만 여름 해에 달궈진 땅바닥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런 것쯤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발바닥에 두껍게 살이 베긴 사람들이 보간들이었다.
식문화로 보자면 고기 파이나 감자튀김 등을 주식으로 먹었다. 튀기거나 심각한 수준으로 가공된 식품이 아니라면 입에 대지 않았다. 또 고당도, 고 카페인의 음료를 물처럼 마셨다. 학교 수업이나 회사 사무실에 가면 자리에 항상 'v'나 '몬스터' 같은 에너지 드링크를 올려놓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길을 가다가도 목이 마르다며 콜라 한 통을 사서 한 번에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파이 페이스에서 일할 때 이런 손님들을 자주 마주쳤다. 음식 주문 없이 콜라만 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목이 마르다며 콜라만 따로 사 마시는 사람을 생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그런 사람들은 모두 미국인 아니면 미국에서 온 한인들이었다. 1.5리터짜리 마운틴듀를 한 손에 들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백인들은 이태원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식습관이 이러니 보간은 몸매와 치아가 많이 망가진 게 보통이었다. 보간은 아주 살이 쪘거나 반대로 아주 말랐다. 마른 사람들은 약에 중독돼서 그런 경우가 많았다.
보간의 화룡정점은 얼굴에 착 달라붙는 스포츠 선글라스였다. 이상하게 보간들은 스포츠 선글라스만 썼다. 아마도 패션보다 기능에만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신을 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문신이거나, 팔 전체를 뒤덮는 뾰족뾰족한 불꽃 모양의 일명 트라이벌 문신이 보간 스타일의 전형이었다. (사케 데이비드의 문신이 꼭 그랬다.)
호주 보간과 우리나라 촌놈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선 더 이상 촌놈 같은 행색의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아무리 촌이라 해도 티브이와 인터넷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누구나가 비슷한 머리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서울에서 보는 사람이나 시골에서 보는 사람의 겉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다 옷을 잘 입는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호주는 아주 넓은 나라라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 시골에서만 산 사람들의 교양 차이가 극명했다.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엔 잡지 모델로도 손색이 없을 사람들이 사무실을 오가고 야외석에 앉아 커피를 마셨지만 조금만 먼 동네를 가보면 아직 20세기에 머문듯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멜버른 메트로 지도를 놓고 봤을 때 시티 루프 City Loop라고 하는 시내 순환선에서 멀어질수록 문명과 멀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프랭크스턴 Frankston의 악명이 자자했다.)
디안드라가 나고 자란 레저브와 Resevoir 가 그런 동네라고 했다. (하필 이름도 ‘저수지'였다. 나는 언제나 ‘저수지의 개들 Reservoir Dogs’를 떠올렸다.) 그녀도 거의 보간처럼 자랐지만 교육과 문화와 예술의 힘 덕분에 그녀는 운명을 거스르고 잘 나가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일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일하다 보니 디안드라를 내 영상에 출연시킬 일도 생겼다.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환학생들이 온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보여줄 환영 영상이 필요했다. 우리 학교와 학생회를 소개하고 멜버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배경음악으로 ‘Greensleeves'를 골랐다. 이유는 없었다. 아주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인터넷에서 그 곡의 리코더 버전을 찾았다. 리코더의 투박한 소리와 음악의 처량함이 섞인 감성이 좋았다. 디안드라에게 리코더 립싱크 연주를 부탁하기로 했다. 내 설정을 재밌게 여긴 디안드라는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우리는 시내에 나가 멜버른의 명소들을 돌아다니며 영상을 찍었다. 그라피티로 유명한 호시어 레인 Hosier Lane 도 갔다. 내가 음악을 틀면 디안드라는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리코더를 부는 척했다.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창피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리코더를 불 줄 모르는 디안드라였다. 직접 연주하라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만 음악에 맞춰 움직이라는 거였는데 디안드라는 리코더를 한 번도 안 배웠는지 악기를 잡는 법조차 몰랐다.
시내를 쏘다닌 끝에 영상을 하나 만들었지만 결국엔 쓰이지 않았다. 갑자기 미국 교환학생들은 오지 않게 된 것이었다. 애초에 뭘 위해서 만든 영상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끼리만 웃으려고 만든 것 같았다. 내 초기의 영상들이 그랬다. 아이디어가 있다며 영상을 계획하고 만들었지만 홍보나 정보전달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이루기보다는 보는 사람들 웃기려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걸 하겠다고 리코더도 사고 다른 스태프의 시간까지 빌려가며 영상을 찍고 편집했던 것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꽤 큰 비용이었다. 그런데도 학생회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영상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서만 어울리던 디안드라와 나의 우정이 바깥으로 이어진 것은 같이 클럽을 가기로 했을 때였다. 멜버른 토박이인 디안드라는 밤문화에도 훤했다. 언제 한 번 같이 놀자며 빈소리가 되기 십상이었던 약속을 우리는 며칠 후에 실행에 옮겼다. 디안드라는 피츠로이 Fitzroy라는 동네에서 매주 한 번씩 열리는 ‘Thursgay’라는 이벤트가 유명하다고 했다. 평소엔 평범한 술집이 목요일 밤마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클럽으로 변하는 날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저녁, 피츠로이에서 디안드라를 만나을 땐 조금 어색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이에서 갑자기 클럽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자들이라는 연대와 즐거운 밤을 보내고 말리라는 의지로 단단해져 있었다. 클럽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술부터 몇 잔을 들이켰다. 마돈나, 머라이어, 리한나, 가가의 노래가 나왔다. 호주의 절대 여신 카일리 미노그도 빠지지 않았다.
일행과 클럽을 가면 다른 사람들이 합류할 틈을 주는 게 중요했다. 결국은 새 사람들을 만나려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이 온 사람들끼리만 뭉쳐서 춤추는 사람들을 보면 뭣하러 클럽까지 오나 싶었다. 나와 디안드라는 둘이서 춤추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일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사람이 많아지고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옆사람과 몸을 흔들게 됐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짝을 찾기도 했다.
저들끼리만 뭉치는 사람들만큼 꼴 보기 싫은 유형은 핸드폰 내려다보느라 바쁜 자들이었다. 무대 가운데 서서 공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혼자 심각한 척하는 꼴을 보는 게 그렇게 싫었다. 그 순간에 뭘 그리 급하게 핸드폰을 해야 할 일이 있을까. 뻔했다. 다른 중요한 일 있는 척 하기. 다른 사람에게 관심 없는 척 하기. 이해가 안 되진 않는다. 어색하고 불편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바빠 보이고 싶어 진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바란다. 모두가 같은 짓을 한다면 누가 먼저 대화를 시작할까. 거기서 한 술 더 떠 데이팅 앱을 켜고 온라인의 누군가와 메시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써 클럽에 나와놓고 다 같이 이러고 있으면 얼마나 우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