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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훈 Sep 14. 2022

멜버른의 여인 3: 사라

나는 어색한 외국인 학생이었다.

매년 3월과 7월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학교에선 O-Fest(Orientation Festival)라고 하는 캠퍼스 축제를 열었다. 학생회가 주관하는 가장 큰 행사였다. 그 외에도 학기 중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으니 행사 코디네이터들은 학생회에서도 제일 중요한 직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나와 같은 시급을 받고 일한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엔 사라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사라는 일도 빈틈없이 했고 말도 또박또박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일을 지시하는 것도 거침이 없었다. 행사를 운영하는 사람에겐 그런 자질이 필수였다. (따지고 보면 비디오 프로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시키고 현장을 감독하는 카리스마가 중요했다. 물론 나에겐 없는 기술이었다.)

사라와의 첫 만남에서도 나는 어색한 외국학생의 끝을 보여줬다. 학생회가 준비한 콘퍼런스에 참여했을 때였다. 행사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사라는 참가자들에게 설문을 하고 있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피드백을 수집하고 다음에 반영하는 작업을 코디네이터들은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사라는 내게 2부도 참여할 생각이냐 물었다.

“No.” 내가 대답했다.

사라는 깜짝 놀라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답했다. 사라는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내가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사라는 ‘행사가 마음에 들었냐'라고 물었는데 나는 다짜고짜 ‘아니’라고 말한 것이었다. 내가 사라를 어렵게 생각한 것만큼이나 사라도 나를 퉁명스러운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 원래 조용한 성격에 서투른 영어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주 사람들에겐 특유의 과도한 예절이 뼛속까지 배어 있어서 그걸 잘 지키지 않는 내가 더욱 무례하게 보였을 것이다. ‘Sorry’와 ‘Excuse me’와 ‘Thank you’를 하루에 수십 번씩 쓰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도 서열문화와 높임말 등으로 한 예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호주의 예절과는 어딘가 결이 달랐다. 예를 들면 호주 사람들은 버스를 탈 때도 기사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고 심지어 내릴 때도 손을 흔들며 “Thank you!”라고 외치곤 했다. 그걸 따라 해 보겠다고 나도 땡큐를 외치며 내려 보기도 했지만 어색해서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랬다간 조금 나사가 풀린 사람 취급을 당할 일이었다. 호주 사람들은 재채기를 해도 “Excuse me”라고 했다. 재채기가 다른 사람들의 정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보는 모양이었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건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혼자 익스큐즈미를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의 재채기가 “우아후!”하고 터뜨리는 것이라면 호주의 재채기는 “찌”하며 깊숙하게 숨기는 것이었다.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작게 찌, 찌 몇 번 하고는 익스큐즈미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이었다. 

“No worries”나 “You’re welcome”과 같은 표현도 쉴 새 없이 썼다. 누군가 고맙다고 하면 당연히 나와야 하는 말이었다. 우리말에도 “천만에요”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 평생 천만에요 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는 단연코 책 속에만 존재하는 표현이었다. “You’re welcome”이 한국말로 뭐냐고 묻는 외국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다. 누군가 내게 물으면 천만에요 라는 말을 알려주기는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다고 꼭 덧붙였다. 그냥 “네에” 하면 된다고. 내가 이 말을 했더니 곁에 있던 한 한국 사람이 반론을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천만에요는 일상에서 쓰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이 사람이 외국에 너무 오래 산 나머지 한국말을 쓰는 뇌가 퇴화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선 이와 같은 일상의 인사치레가 인색했다. 반면에 호주는 Thank you에 You’re welcome을 하지 않으면 멀뚱멀뚱 쳐다보며 기다릴 정도로 당연한 반응으로 여겼다. 주거니를 하면 당연히 받거니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끊겼으니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한 번 사무실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 새 옷을 입고 출근을 했더니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동료가 있었다. “I like your jacket!”

그러면 자동적으로 “Thank you”라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는 짐짓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에 가서 얼마를 주고 샀다고 덧붙여야 했다. 이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대화였다.

하지만 “I like your jacket!”이라는 칭찬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I know, right?”

누구는 웃음을 터뜨렸고 누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재킷이 내게 잘 어울리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산 것이다. 그런데 뭘 괜히 겸손의 연기를 펼쳐야 할까.


셀카를 찍는 사라와 나

호주 사람들의 또 다른 허례허식은 “How are you?”였다. 만날 때마다 하는 소리였다. 상대방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허공을 채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던지는 무의미한 표현이었다. 사무실에서의 대화는 종종 이렇게 진행되곤 했다.

동료: Hi, Jee. how are you?

나: I’m good, thanks. How are you?

동료: I’m good, too. Thanks.

(침묵 속에서 커피를 마신다.)

동료: So, how have you been?

나: Yeah, good, busy. How about you?

동료: Yeah, same.

(침묵)

동료: (사뭇 진지하게) So, how are things?

그제야 나는 상대방이 진짜로 궁금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내 얘기를 시작한다. 하와유의 무궁무진한 변형인 “How are you going”, “What’s going on” 등을 적어도 세 번은 주고받아야 겨우 무언가 의미 있는 소통이 진행되는 것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할 때도, 옷가게에서 구경을 할 때도 직원들은 하와유 하와유 거렸다. 파이 페이스에서 일할 땐 내가 먼저 하와유를 던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 손님들은 한결같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Good, thanks, how are you.”

하와유가 너무 몸에 밴 나머지 어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다 나도 모르게 직원에게 먼저 하와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직원이 말했다. “You don’t have to ask that.”

수백 명의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자신도, 직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 따윈 없는 나도 하와유를 묻는 건 소모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그걸 설명하느라 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직원은 역설적이었지만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었다. 신선했다.

거절을 할 땐 “No”보다는 “No, thank you”가 더 정중한 표현이라고 배웠지만 호주에선 이조차 말이 너무 짧다고 느낀 게 분명했다. 누군가의 호의를 점잖게 거절하기 위해 이 사람들은 더욱 긴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Thank you but no, thank you.”

노땡큐에는 됐으니까 꺼지라는 어감이 묻어났다 보다. 그래서 그 앞에 땡큐를 또 붙인 것이다. 이 마저도 효력이 다한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더 긴 문장이 속속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Thank you but no, thank you. But thank you.”

쏘리와 땡큐노땡큐땡큐를 입버릇처럼 쓰고, 버스에선 기사에게 만남과 작별의 인사를 꼬박꼬박 건네고, 이 버스가 어드메를 가냐고 정거장에서 묻는 승객이 있으면 기사는 구구절절 노선 안내를 해주며 버스를 멈추고 서있고 승객들은 아무 불평 없이 가만히 앉아있고, 건물 출입구의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호주 사람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철저한 예절 교육을 받았다는 게 느껴진다. 공공장소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타이르는 광경도 흔하다. “Where are you manners?” 그러면 아이들은 조그맣게 “Please”와 “Thank you”를 웅얼거렸다. 이런 감사와 사과의 표현들이 무척 당연하다고 여긴 나머지 이를 어기는 사람을 만나면 누가 볼기라도 때린 듯 놀라는 것이었다.

사라와 디안드라가 서양식 겉치레에 집착하며 고고함을 떠는 친구들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자신들의 방식과 달랐기 때문에 새롭고 재밌게 생각한 것 같았다.


디안드라, 나, 사라, 제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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