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1코스부터 순서대로 21코스까지 걷기로 아내와 결정했다. 그리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한 코스를 두 등분 혹은 세 등분으로 나누어 걷기로 했다. 지금까지 순서에 상관없이 뛰엄 뛰엄 걸었는데 1코스부터 차례로 걷는다고 생각하니 마음 가짐이 다르다. 목표를 정하고 이루고자 하는 유비 관우 장비의 당찬 '도원결의'가 생각날 정도다. 게다가 많이 안 걸으니 마음도 편안하다. 오늘의 코스는 이렇다.
*올레길 1코스 오늘의 코스 서귀포 중앙로터리(101번 버스)- 성산고 입구 삼거리-201번 환승-시흥리 하차(올레길 1코스 출발지)- 말미오름- 알오름- 종달리 옛 소금밭-목화휴게소(중간지점)
101번 빨간 급행 버스를 탔다. 역시나 시원하게 '서귀포 로터리'를 출발해 '성산고 입구 삼거리'까지 30분 만에 돌파다. 201번으로 갈아타고 1코스의 시작점 '시흥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 여기 어딘가 와 본 기억이 난다. '낯익다'
"아내, 여기 우리 연애할 때 와 본 데 아니야?"
"글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확실하다. 저기 보이는 바위 정확히 기억나는데...."
"근데. 아침에 커피랑 귤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화장실이...."
아내와 나 화장실이 갑자기 급하다. 올레길 안내센터 화장실까지 걸어가려면 10분 정도. 그런데 길이 공사 중이어서 돌아가란다. 비워야 하는데 자꾸 차기만 하니 주위 청보리와 유채꽃과 들꽃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온다. 얼른 해결해고 싶은 마음뿐이다. 20분 넘게 걸었더니 드디어 1코스 안내센터가 보인다. '여기 정확히 기억나네! 연애 때 아내랑 왔던데!' 그런 마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화장실로 달려간다.
"천국이 따로 없네."
화장실 볼일 보고 나온 아내가 시원하게 말한다. 100프로 공감이 간다. 이제야 주위 풍경이 제대로 들어온다. 시작점을 알리는 곳에서 사진도 찍고 마음의 여유를 가진다. 아내도 여기 안내센터를 보더니 여기 온 기억이 난다고 그런다. '말미오름'부터 오르는 코스다. 추억은 좋았던 기억만 남는 모양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시작부터 장난이 아닌 오르막, 이 오르막은 좋았던 추억 속에 아예 없었다. 오르막에 오르니 저 멀리 우도와 성산일출봉과 맑디맑은 바다가 쫙 펼쳐진다. 소똥 냄새와 함께 8년 전 추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참 희한하다. 올레길 1코스가 하필 연애 때 와 본 곳이라니. 맞지?"
"역시 우린 시작부터 같이 할 운명이었나 보다."
"그렇네. 결혼해서 아이들 잘 키우고 다시 여기 1코스로 왔네. 그땐 무슨 올레길 걸었던 건 생각이 나는데 1코스인 줄 상상도 못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 저기 좀 더 걸으면 늪지 같았던 곳이 나왔고 말도 보였던 것 같은데 했는데 정확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완전히 잊었다 생각했던 오래전 노래 가사를 나도 모르게 똑같이 따라 부르는 기분이다. 뭘 써야 될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났는데 한 문장을 쓰니 다음에 했던 일이 저절로 생각나 문장이 저절로 써지는 기분이다. 우리 머릿속은 그곳에 가면 그 노랫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소환되는 당체 알 수 없는 우주인가 보다!
8년 전 여기에 와서 찍었던 사진을 꺼내 본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사진이라 즐겨찾기를 해 놓아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때의 아름다운 제주도 풍경에 압도되어 감탄했던 행복했던 추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때 아내가 찍어줬던 사진이다.
8년전 사진 소환(2014), 올레길 1코스였다. 얼굴이 탱글탱글하다.
8년 전 코스프레를 해 보려고 하는데 똑같은 장소를 찾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알오름 정상에서 가장 비슷한 곳을 찾았다. 아내가 연신 찍어주는데 장소는 비슷하다. 근데 얼굴이 영 아니다. 8년 동안 이렇게 얼굴이 갈 수가 있단 말인가? 풍경은 예전처럼 똑같이 아름다운데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오늘도 아내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8년후 지금 사진(2022), 흰 머리에 주름. 늙었다. 풍경은 그대론데...
1시간 넘게 걸었더니 허기가 진다. 가방 속에 며칠 동안 들고 다녔던 껍질이 쭈글쭈글해진 한라봉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는데 그 맛이 황홀하다. 아내가 준비한 도넛까지 먹으며 아름다운 제주 바다와 우도, 그리고 성찬 일출봉까지 보고 있으니 입맛에 감탄 한 번 눈 맛에 감탄 두 번 뭐 신선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 풍경을 바라보며 눈에 넣고 마음에도 넣는다.
하산이다. 알오름부터 종달리 마을까지 가는 길. 노란 유채꽃과 연한 핑크빛 무꽃 그리고 찐 보라 제비꽃이 곳곳에 활짝 피어 봄을 알리고 있다. 바람은 아직 차가운데 태양은 벌써 뜨겁다. 모자에 장갑에 스틱까지 모든 장비를 갖췄더니 뜨거운 햇볕도 전혀 무섭지가 않다. 아내랑 오래전 친구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이 아름다운 제주 올레길 봄길을 걷는다.
8년 전엔 이 동네가 '종달리 마을'인 줄도 몰랐는데 이제야 정확히 알겠다. '종달리' 석 자를 마음속에 새겨본다. 종달초등학교 주변 마을이 아름다운 꽃 벽화로 물들어있다. 그땐 없었는데 벽화 속 예쁜 꽃과 아기자기한 찻집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으니 마을이 더 예쁘게 다가온다. '저런 집 살면 참 좋겠다!'란 생각으로 어디서 먹을까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어! 저기 저 나무 기억나? 너무 힘들고 더워서 벤치 위에서 잤던 거?"
"어. 저기네. 바로!"
저 멀리 나무 한그루가 나온다. 올레꾼들의 쉼터다. 지명도 정확히 알았다. '종달리 옛 소금밭'이다. 쉬고 있으니 앞에 가게가 하나 보인다. '종달 아구찜'이다. 난 저렴한 몸국 8,000원짜리 먹자고 했는데 아내는 '아구찜'이 먹고 싶다고 그런다. 메뉴를 보더니 아내 아구찜과 갈비의 조합인 이 집 간판 메뉴인 '아갈찜' 소자를 35000원에 시켰다.
기본 밑반찬인 간장게장과 해초무침 그리고 이름 모를 초록 야채무침에 자꾸 젓가락이 간다. 옆 테이블에서 막걸리를 하나 시키는데 갑자기 당긴다. 밑반찬도 동나고 해서 막걸리를 하나 시키면서 밑반찬도 좀 더 달라고 한다. 막걸리 한잔을 원샷했다. 이어 초록 야채무침을 먹었는데 이건 뭐 또 신선이 따로 없다. 그리고 바로 나온 아갈찜 맛도 예술이다. 알과 아구살을 먹었는데 살살살 입에서 녹는다. 게다가 미더덕도 엄청 크고 한 번씩 나오는 갈비도 졸길 쫄깃하게 입안을 황홀하게 한다.
"(아갈찜) 안 먹었으면 진짜 후회할 뻔했다."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그렇게 좋냐?"면서 막걸리와 아갈찜을 맛있게 남김없이 먹는 내 모습이 보기 좋은지 몇 번이나 나의 행복한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막걸리에 취해 음식에 취해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살짝 비틀거리며 버스를 탄다. '고마워 제주야! 고마워 아내야! 이렇게 1코스를 8년 만에 다시 만나 걸어서.' 아내가 오름 걸으면서 한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