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틱에 우비에 등산화까지 챙겨 밖에 나오니 빗방울이 날리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오늘 이건 쫌 아닌 것 같은데."라고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나도 이 날씨에 산에 가는 게 뭔가 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이왕 나온 이상 새로운 곳을 개척한다는 탐험정신으로 마이너스 상황을 플러스 상황으로 긍정적으로 바꾸어 본다.
역시나 마음이 중요했다. 날씨도 나의 긍정 마음에 신호를 준다. 20여분 버스를 타고 내리니 비가 뚝 멈추고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엉또폭포 가는 길 한라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이렇게 깨끗하게 잘 보이는 건 처음이다. 비바람이 산행은 방해했지만 멋진 한라산을 보여주는데 한몫을 제대로 한다. 시작은 두려웠지만 막상 올레길에 오르니 힘이 난다. '오길 참 잘했다!'
'엉또폭포' 가는 길. 차들이 쌩쌩 거리며 우리를 앞질러 간다. 차로도 갈 수 있는 모양이다. 다들 나처럼 비가 와서 폭포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로 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폭포 입구 데크길 앞에 섰는데 폭포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고 고요하다. 저 멀리 폭포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도 않는다. 폭포 보고 오는 사람들 표정도 뭔가 시무룩하다.
예상이 적중했다. 물 한 방울도 안 떨어진다. 하하하하.
'이 정도 비로는 택도 없네.'
엉또폭포는 못 봐서 아쉽지만 여기 오는 길을 정확히 익혔으니 그것만이라도 만족한다.
'비 엄청 오는 날, 널 꼭 보러 다시 올 거야!'
다음 목적지는 고근산이다. 엉또폭포 구경하러 온 사람은 많은데 고근산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아내와 나 둘 뿐이다. 둘이서만 자연 속을 걸으니 폭포 못 본 기분이 싹 가신다."아무도 없으니까 너무 좋네!"라며 아내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난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입을 크게 벌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마신다. 코로도 마음껏 이 신선한 숲 향기 가득한 바람을 빨아 당긴다.
여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맑은 숲 공기 너무 좋다. 바람을 폐 안쪽 폐포 하나하나까지 다 닿게 한다고 생각하고 그곳까지 한 번 보내 봐! 폐가 좋아할 거야!
책 어디서 읽어 본 내용이라 따라 했는데 폐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튼 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너무 신선함 그 자체다.
"우리 어제 올레센터에서 받아온 쓰레기봉투에 쓰레기 줍는 거 할까?" 아내의 말에 순간 마음이 갈팡질팡했지만 "한 번 해 보자!"라고 마음을 맞췄다.
고기 굽는 집게를 꺼내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니 멋진 풍경은 안 들어오고 쓰레기와 담배꽁초만 눈에 들어온다. 하하하하. 희한하다. 게다가 세상에 담배꽁초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 조그만 봉지에 채워도 채워도 차지가 않는다. 게다가 무거워진 일반쓰레기 봉지가 고근산 올라가는 계단을 힘들게 한다.
'왜 하필 오늘 이 험한 산을 올라갈 때 쓰레기를 줍길 시작했을까? 다음엔 무조건 길 좋을 때 하자. 그리고 담배꽁초 줍는 거만 해야겠다. 일반쓰레기는 너무 무거워서 너무 힘들다!'
혼자서 한없이 불평을 하고 있는데 계단 사이에 초록초록 자란 작은 풀들이 내게 말을 건다. "우린 이 높은 산에서도 추위와 비와 바람을 이겨내고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 "
'그래 그래 이 초록 풀들도 불평 안 하고 살아가는데 나도 할 수 있다. 좋은 일 하고 있다. 산을 깨끗하게 하고 있다. 이 높은 계단 올라갈 수 있다. 힘내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발 한발 걷는다.
힘겹게 올라간 고근산 정상에서의 서귀포 풍경이 예술이다. '헉!' 아무 말도 없이 한 동안 그 경치만 쳐다봤다. 힘겹게 올라왔던 불평이 한순간에 쏙 들어갔다. 그런데 고근산 정상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람이 바람이 내 몸이 진짜 날아갈 것 같처럼 세게 분다. 주운 쓰레기 봉지랑 사진을 겨우 찍고 스틱을 꺼내 힘겹게 내리막을 걸어내려간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클린센터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아내가 찾은 '솔왓 동산 식당'. 얼마나 고근산을 힘겹게 걸었는지 반찬 하나하나가 다 꿀맛이다. 고등어구이에 돼지 두루치기 그리고 오이무침까지 하나같이 다 깔끔하다. 아내랑 나 배가 너무 고파 반찬 하나도 안 남기고 싹 비웠다. 5점 만점에 4.5점이다.
"우리 다음에 나꽁초만 하자!"내가 말했더니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나 꽁초 아니고 나꽁치(나부터 꽁초 치우자)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돼!하하하"
난 왜 나꽁초가 편하지. 밥 먹고 나니 농담할 기분도 생긴다.
버스정류장에서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추워아내가 "춥다"라고 했는데 현지 할머니께서"겨울 들었다."라고 알려준다. 하나 배웠다. 오늘 날씨 진짜 겨울 든 날씨 맞다. 정말 춥다.
춥고 힘든 산행이었지만 '고근산' 볼 때마다 함께할 담배꽁초 추억이 생겼다. 고근산 오르면서 생각난 고근산 삼행시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