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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쌤 Aug 07. 2022

형과 함께 걸은 제주 올레길 7-1(생맥을 생각하며)

"나 제주 내려왔는데 한 번 안 볼래?"

"네! 행님 당연히 좋죠."

"나 올레길 걸을 건데 7-1코스 같이 걸을래?"

"좋죠. 산길이라 험할 건데... 아무튼 그때 봐요. 행님!"


나의 첫 발령지, 지금은 폐교가 된 경기도 한 초등학교에서 형을 만났다. 제주서 태어나 주교대까지 나온 형, 무작정 떠나고 싶으셔서 경기도까지 왔다고 한다. 12년 만에 다시 만난 형, 주름이 살짝 많아지셨지만 늘 그렇듯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먼저 반기셨다.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형을 안았다.


이틀 전에 한라산 백록담을 생생하게 봤다는 형, 물이 고인 백록담 사진을 보여주는데 순간 형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알고 보니 나보다 올레길 고수였다. 남쪽에 있는 올레길 두 세 코스 빼고는 패스에 올레길 도장이 가득했다. 올레길 자고 할 때 산이 험하다고 한 내가 부끄러웠다. 아무튼, 산에서 쫄쫄 굶을 순 없으니 김밥 3줄을 사서는 7-1코스를 오르기 시작다.

기본 김밥인 '통통 김밥' 세 줄을 주문했다. by도도쌤


남자들 둘이 수다가 시작되었다. 남자들의 수다라? 음.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건 같은데 초등에 계신 남선생님들 수다는 여자들 수다 동급 내지 그 이상이다. 12년의 세월만큼 못다 한 얘기가 많다. 올레길을 걷고 있는지 수다를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주일 후에 교감 발령을 기다리고 계신 형, 모쪼록 잘 됐으면 좋겠다. 수다 삼매경에 어느새 신시가지 마을을 지나 숲 속 길을 지나 엉또 폭포길에 들었다.

죽은 아기 뱀 by도도쌤

"앗! 저거 뭐야?"

"꽃뱀이다."


살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기 유혈목이가 죽어있다. 불쌍했는지 형이 나뭇가지로 아기 꽃뱀을 들어 풀숲에 던져준다. 삶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아기 뱀이 마냥 가여웠다. 우리네 삶도 '죽음'이라는 것과는 떼어낼 수 없는 것이기에 뭔지 모를 찐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잘 살아보자라고 파이팅 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다.


"행님, 저기가 엉또폭포입니다. 물 한 방울도 없습니다."

"그래?"

"대신 제가 저번에 직접 찍은 영상 보여드릴까에?"

"아니다. 직접 와서 눈으로 보고 싶다."

물이 없는 엉또폭포, 생각보다 멋졌다. by도도쌤

폭포가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니, 형이 올레길이라고 폭포가 없는데도 가 보자고 한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굉음을 내며 떨어졌던 폭포 길이 아주 고요하다. 나무가 둘러싼 바위 절벽이 마치 천지연 폭포 주위 같다. 그 형세가 주는 웅장함에 한동안 넋을 읽고 쳐다본다. 폭포는 없었지만 꽤나 운치 있는 뜨거운 한낮의 엉또폭포 감상이었다.


저번에 아주 아주 힘겹게 걸었던 '생하며 근이 걸었던 ' 고근산이 눈앞에 보인다. 스틱을 꺼내서 준비태세를 마쳤다. 계단이 나오기 전까지 고근산은 '즈넉이 심 없이 걷기에 좋은 산'이었다. 하지만 계단이 나오자  '생하며 근이 걸었던 ' 고근산이 다시 생각난다. 걷다가 멈추고 헉헉, 걷다가 멈추고 휴, 아래를 쳐다보고 위를 쳐다본다. 저번엔 안 보이던 숫자가 계단에 보인다. 600이 넘은 숫자다. 그 계단을 오르니 시원하게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져있다. 며칠 전에 오른 군산 정상에서의 느낌과 흡사하다.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는 고근산 정상 by도도쌤

'김밥'만 생각하고 걸은 고근산 정상에서의 김밥 맛은 조촐하지만 황홀했다. 깨진 얼음 물통에서의 쭐쭐 흐르던 시원한 물맛도 일품이었다. 퍼질러 앉아서 형님과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힘을 다시 재 충천했다. 형님도 나처럼 무릎이 안 좋아 무릎보호대를 차신다. 나이가 드니 무릎, 이, 눈, 허리 안 아픈 데가 하나도 없다. 이런 건 안 닮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닮는가 보다. 하하하.

7-1코스, 고근산 정상. 한 바퀴 돌다보면 편백숲길이 있다. 여기 그늘에서 김밥을 먹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by도도쌤


고근산 정상 한 바퀴를 돌며 옛 서귀포 시내 풍경도 바라본다. 우리 동네 자랑거리인 범섬 문섬 섶섬, 그리고 지귀도를 착착착 설명해준다. 내리막길, 형과 함께 걸으니 하나도 힘든지 모르겠다. 


"우리 다 걷고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하자."

"좋죠. 행님."


이 더운 땡볕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형이다. 예전에 같은 학교 다닐 때 종종 "아자아자, 잘 먹고 잘 살자!"라고 술 먹기 전 힘차게 외치던 형 모습이 생각난다.


큰 도로에 접어들었는데 차가 하나도 없으니 도시에 살았던 형이 신기해한다. 차도 없고 높은 아파트 빌딩도 없는 끝도 없이 펼쳐진 제주 하늘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아내와 맛있게 먹었던 자두맛 탱크보이를 형님과 편의점에서 나란히 먹는다. 진짜 자두는 아니지만 진짜 자두를 먹는 것 같다. 형도 맛있다며 중간중간 쉬면서 여유롭게 걸으니 좋다고 한다. 혼자서 걸을 땐 제대로 쉬지도 않고 걸었다는데 중간중간 쉬며 먹는 만의 올레길에 형도 좋아라 하신다.

봉정사, 머리에 끼얹은 시원한 물바가지 세례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by도도쌤

올레길을 걸으며 만나는 좁은 마을길이 아담하다. 마음에 든다. 평화롭다. 뙤약볕 속을 걷곤 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다.


"제주도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

형이 갑자기 하는 말에 급 공감한다. 평화로운 올레길은 차도 없고 높은 건물도 없다. 10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시간이 멈춘 그 길에 형과 함께 걷고 있다는 자체가 감사하다. 고근산까지만 걸은 나, 여기 마을길은 처음이다. 우연히 만난 봉정사는 참 아늑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이곳, 봉정사 뒤편에서 만난 약수터, 머리에 끼얹은 두 바가지 물은 더위에 지친 우리를 얼음세상으로 안내해줬다.


"우... 우... 우... 우.. 우.. 우와..(시원하다)"

시원한 물이 형의 머리를 적셔줬을 때의 형의 깜짝 놀라 기뻐하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벼가 있는 하논 분화구 풍경, 여기가 진짜 분화구인 모습이라면 얼마나 장관일까 상상을 해 봤다. by도도쌤

항상 차로 지나쳐 여기 하논 논길은 처음 걸어본다. 다가 벼를 만났는데 정말 정말 반갑다. 순간 내 몸이 공간 여행을 했다. 육지 어느 시골 마을, 벼가 쫙 펼쳐진 길을 걷고 있다. 벼가 없었다면 원래는 화산 분화구였던 '하논 분화구', 그 가상 그림과 시뮬레이션을 보니 또 장관이다. 몇십 년 후면 이곳이 화산 분화구의 모습으로 바뀌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지 않을까 상상을 해 봤다.

서귀포 올레센터 by도도쌤

드디어, 올레센터에 도착했다. 올레센터 앞 돌의자에 털썩 앉았다. 해 냈다는 뿌듯함이 밀려든다. 볕을 막아줬던 소중한 모자와 내리막에서 나의 두 다리가 되어줬던 스틱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는다. 시원한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 기분이 참 좋다.

시원한 생맥 한잔과 안주들. 이 맛에 5시간 올레길을 걸었다. by도도쌤

힘들 때마다 떠올린 맥주 한잔이 현실이 되었다. 형과 함께 '짠!' 했다. 그리고 먹은 맥주 한 모금. 멈추려고 했는데 머리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알싸함과 시원함이 목과 정신을 지배한다. 근래 들어 먹은 최고의 맥주 한 모금이었다. 5시간 넘게 걸었더니 맥주랑 안주가 달달했다. 형의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겨울방학 때는 같이 한라산 백록담 보러 가요."라는 내 말에 "그래"라고 대답한 형, 맥주 석 잔에 기분이 좋아 또 환한 웃음을 보이며 잘 가라고 하는 형, 밝은 형 모습에 즐겁게 살아가는 형 모습에 하루 내내 행복했던 올레길 7-1코스 길이었다.


어느 길이라도 좋다. 그리운 사람과 길을 걸으며 얘기하는 기분이 참 좋다. 다음엔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바로 술집에서 만나지 않고, 걸으면서 이야기 나눠야겠다. 더 솔직해지는, 함께 으샤 으샤 이 세상 같이 살아가는 느낌이 확 든다.

15킬로 올레길 7-1코스를 완주하다. by도도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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