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심각했지

by 일용직 큐레이터

하루짜리 알바를 구했다.

노가다 탈락 후 지원한 공장 일로 일당 9만 원짜리다.

내일은 내 생일이다.


오늘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맛난 음식하나 시켜 먹기로 했다.

건설현장 인원이 줄면서 노가다를 못 나가는 날이 늘고 있다.


12만 원짜리 노가다 보다

3만 원이나 적은 공장 알바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처지가 아니다.


6시 30분 ㅇㅇ역 4번 출구 73버 4321(가칭) 셔틀버스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차 끌고 가면 시간도 여유롭고 몸도 편하다.

다만 기름값이 든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 ㅇㅇ역으로 향했다.

4번 출구로 나가니 작업복을 입은분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나도 합류해 버스를 기다렸다.


6시 25분쯤 버스 하나가 섰다.

번호판을 확인했다.

'4321(가칭)'이 맞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버스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몇 곳을 더 들려 7시 30분쯤 도착하는 버스다.


하루짜리 알바지만 눈에 잘 들면

계속 불러줄 수도 있다.

이곳저곳에 옵션을 만들어놔야

공치는 날 없이 일할 수 있다.


얼마나 달렸을까?

지도앱을 켜니 기장군에 막 진입했다.

곧 도착하겠군...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무슨 일을 할까 생각했다.

무거운 걸 들기보다 잔 손이 많이 가는 조립을 해보고 싶다.


달리는 버스 밖 풍경을 보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차가 밀린 것도 아닌데 도착이 왜 늦지?


버스는 이미 기장군을 넘어서고 있었다.

기분이 싸하다.

분명 차 번호를 확인하고 탔는데 잘못 본 걸까?


가끔 이런 실수를 한다.

분명 확인했다고 믿었는데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이를 먹으니 더 잦다.


오늘도 그런 날일까?


버스는 기장군을 넘어 울주군에 진입했다.

시간은 8시가 가까워 간다.


내려야 했다.

어디서든 내려야 했다.

지도앱을 보며 내릴 곳을 물색했다.


동해선과 가까운 곳에 내려야

집에 갈 수 있다.


달리던 버스가 시내에 정차했고

20명쯤 돼 보이는 외국인 분들이 차에 올라서려 했다.

이때다 싶어 후다닥 내렸다.


뭐 하는 놈이야? 하는 눈초리를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 밖을 나섰다.

내리자마자 번호판을 확인했다.


63나 4321


앞번호가 다르다.

뒷번호는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뒷번호만 확인하고 탄게 실수였다.


내 잘못이다.


죄송합니다. 셔틀버스를 잘 못 타 엉뚱한 곳에 와버렸네요.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친절하던 담당자가 싸늘하게 물어왔다.

당연하다.

나 같아도 어이없고 화날 일이다.

일을 펑크 냈으니...


죄송하지만 못 간다 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 차 끌고 올걸...

후회가 든다.

차만 끌고 왔어도...


처음으로 알바 펑크를 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각, 결근은 안 하던 나인데...

거듭 죄송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이제 갈 걱정을 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가까운 역을 찾았다.


망양역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들어보는 역이다.


버스를 타고 망양역으로 향했다.

위대한 울산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다 울산 아니 울주까지 와버렸다.


웃음밖에 안 나온다.

번호판을 잘 못본건 맞지만

뒷번호가 똑같다.


1. 6시 30분

2. OO역

3. 4번 출구

4. 번호판 뒷자리 4321

5. 셔틀버스


이런 우연이 가능한가 싶었다.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가지나 겹치는 그런 우연말이다.

서로 자매회사도 아니고

기장과 울주에 있는 다른 회사의 셔틀버스다.

같은 시간, 같은 역, 같은 출구, 같은 뒷번호판이라니...


내일은 내 생일이다.

웃음밖에 안 나온다.

처음 울주군에 왔으니 맛집이라도 갈까 싶었다.


맛집을 검색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겨우 오전 9시밖에 안 되었다.

문 연 곳도 얼마 없다.




망양역에 도착해 동해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솥 도시락에 들러

8천 원짜리 제육덮밥을 샀다.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양 많이'를 골랐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긴다.

이일 저일 하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긴다.


하루를 날렸고

9만 원을 못 벌었고

신뢰도 잃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심각한 날이었다.

keyword
이전 13화28,600원짜리 무궁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