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땅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날

빨래를 하자

by 문어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곳에서 내게 월급을 주려고 할까. 퇴사는 경솔한 선택이었을까. 지난 5월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 약을 꾸준히 먹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아무 일 없는 듯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었을까. 추석즈음에는 쏠쏠한 떡값이 나왔었는데. 생활비는 통장에서 자비 없이 빠져나간다. 오이 호박 상추 채소가 비싸다. 하루에 한 끼 식사도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죽을 것 같아서 회사를 나왔는데 돈이 아쉬워서 내 결정을 곱씹고 있다. 한심하다.


푹 쉬었다. 이제 좀 쉰 것 같다. 죽고 싶은 마음이 녹고 비로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눈에 보인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햇볕에도 투명한 가을냄새가 난다. 따가운 매미 울음소리도 나쁘지 않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마냥 놀면 좋겠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사람이 싫다. 혼자 사부작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구직사이트를 둘러본다. 자신이 없다. 내가 해왔던 일은 자신이 없고, 안 해봤던 일은 더 자신이 없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게 월급을 줄 곳이 있기는 한 걸까. 내게 월급을 준다고 한들, 내가 원치 않는 직무일 땐 이전직장에서처럼 버티다 딱 때려치우고 나올 건데. 내 무지개똥고집은 이럴 땐 타협이 없다. 뭐든 수용할 것처럼 참다가 어느 순간 똥고집이 무지개색으로 물들어버리면 어떤 누가 뭐라 해도 망나니 같은 결정을 해버리고 만다. 그땐 나조차 망나니결정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빨래방에 가서 빨래를 해야겠다. 쌓아놓았던 수건과 옷가지를 주워 모은다. 가을에 입을 티셔츠도 빨래망에 넣어 몇 개 챙긴다. 다 빨아버리자. 생각을 멈출 수 없으면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며 멍이라도 때려야 한다. 나는 무지개똥고집으로 생계수단을 발로 차버렸지만, 그래서 나는 아직 산다. 살아있다. 저녁은 부대찌개를 먹어야겠다. 라면사리도 넣고 아주 칼칼하고 매콤하게 먹어주겠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일찍 자야지. 완벽해. 너는 완벽한 문어야. 아주 잘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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