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간지러움 못지 않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꽤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실제로 똑똑한 듯한 면도 많이 보이기는 했다만
주로 성적과 공부 부분이었다.
생활에도 똑똑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한참 뒤에 깨달았고
그 부분은 평균 수준(어떤 분야는 평균 이하였다.) 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틀간의 피부간지러움 이슈에 시달리면서
겨울철의 피부건조에서 식중독으로 다시 알러지로
그리고는 더더욱 나쁜 여러 가지 무거운 병의
전조 증상으로 내 걱정은 자꾸 커져만 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는 일 밖에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잔 하루였다.
아침 산뜻하게 일어났는데 갑자기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늘이 강의 나가는 대학교 <설립자의 날>이라 강의가 없는데
내 기억이 맞나가 의심되기 시작한다.
한 때 동네에서 똑똑함의 표상이었던 나 맞나?
할 수 없이 일정을 빼곡이 적어놓은 달력도 보고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이 내용으로 이야기도 기억해보고
대학교 홈페이지까지 살펴보고는 마음을 조금 놓는다.
아침 일찍이라 모든 것을 물어보는 젊은 교수님에게 차마 톡을 보내지는 않았다.(못했다.)
이렇게 사서까지 걱정을 하고 돌다리도 두들려보는 스타일이니
피부 간지러움 증세로 건강 걱정의 끝판왕이 되지 않게
오늘 즈음에는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를 희망해본다.
<설립자의 날>이라 강의가 하루 없지만 딱히 좋은 것은 아니다.
보강을 해야 해서 방학이 늦어지는 것 뿐이다.
해야 할 강의 숫자가 줄어드는 매직은 없다.
요즈음의 대학은 공휴일이라도 한번 빠지는 것도 모두 다 보강 처리를 해야하는
칼캍은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만 비싼 학비를 내는데 그것이 맞는 것이다.
비싼 학비를 더 이상 올리지 못해서 강사비가 10여년째 동결되고 있음이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만.
젊은 강사님들의 생활 유지가 쉽지않겠다고 사서 걱정 중이다.
대학 교수로 버티려면 그래서 집안의 경제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시스템은 후진 것이라고 말이다.
오늘은 저녁에 중요한 연구 온라인 회의가 있고
(오늘은 연구 진행방향을 잡아야만 한다.)
온라인으로 비교과 프로그램 참여하는 학생들의 실험이 있는데
(준비물을 안가져간 학생들은 19일에 진행해야만 한다.)
두 가지 다 나의 역량이 차지하는 지분율은 높지 않다.
연구팀은 내가 연구 책임자이기는 하나
오늘 활발한 의견 교환으로 기준이 설정되어야 하고
(나는 대체적인 안만 가지고 있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온라인 실험은 각자 학생들이 주축이니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는데
일단 참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만
다양한 전공학생들이라 소통 방법이 핸드폰 문자밖에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단톡을 구성해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만
학생들의 개인정보를 받아두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었다.
이래저래 첫 학기라 놓친 점들이 많다.
앞으로는 더 놓칠 일만 있는 나이인데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 어떠한지 이제는 확실하게 안다.
나의 실수로 나의 부족함으로 생기는 일들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면 되는데
다른 사람이나 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두렵다.
그리고 이제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할 일들만 남아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일요일 오후 잠실 야구장 테이블석 처음보는 점잖은 40대 아저씨의 벗어놓은 코트에 맥주 몇 방울을 흘렸는데(손아귀 힘의 부족이다.)
흔쾌하게 용서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야구 보는 스타일도 점잖고 <불꽃야구>를 묵묵히 응원해주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주위에 그렇게 점잖게 용서해주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흔쾌하게 도와주는 천사들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겠나?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소망하는 아침이다.
<오늘 강의 없는 거 맞죠?>누구에게인가 이렇게 물어보고만 싶은데 많이 창피해서 그것만은 못하겠다.
(방금 전 출석 시스템에 들어가서 오늘 휴강임을 확인했다. 이제 안심이다. 그래. 거기를 확인하면 되는거였다. 이제라도 찾았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