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픈게 최고
지금까지 여름 이후로 강의 준비에 이사 준비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그 와중에 아픈 남편 식사 준비와 때때로
원인 모를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기도 했고
지나치게 과로였던 것이 맞다만
며칠 아파서 자고 먹고를 해보니
정신없이 일하던 그때가 훨씬 좋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먹고 자고 다시 먹고 자고를 해봐도 딱히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간지럼 증세는 훨씬 나아졌다만
항히스타민제 약의 효과가 너무 커서 약을 먹으면 좋음이 쏟아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금요일 출근부터는 약을 끊어야겠다.
그래야 강의를 할 수 있겠다.
아침 먹고 약을 먹고 잠시 누웠다가 이대로 누워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세탁기를 돌려놓고 청소기도 돌려놓고
지하철 한번으로 갈 수 있는 고속터미널에 가보기로 집을 나선다.
백화점 지하에 주방기구(각종 뒤집개나 주걱, 도마 등등)을 모아놨던 팝업 스토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번 이사로 주방 기구와 욕실 기구도 총 점검 중인데
대부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다시 사는 것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었다.
최소 5년 이상씩 되었던 것들이라 이제 놔줄 때도 되었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대대적인 지하 푸드코트 리모델링을 거쳐서 그 팝업 스토어가 없어졌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 대신 눈에 뜨인 것이 내가 좋아라하는
심플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실속 매장이다.
무게가 꽤 나가는 주방 용품을 제외하고 비교적 가벼운 욕실용품을 골라들고는
재빨리 베트남식 고기와 쌀국수와 야채가 섞여있는(이름은 잘 모르겠다.) 도시락을 하나 사가지고 귀가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더더욱 빠르게 피로도가 급습한 것이다.
내 최애 조끼를 하나 살까하다가 옷가게쪽으로는 들어서지도 않고 그냥 지하철로 직진했다.
쇼핑도 덕질도 산책도 열일도
모두 아픈 곳이 없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안아픈게 최고라는
그 간단하고도 소중한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된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이 시간에 많은 중고생들을 보고서야
내일이 수능날이고 오늘이 예비소집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작년까지는 잊어버릴 수 없는 오전 수업일에 휴일이었는데 말이다.
작년 빼고는 모두 수능 감독에 차출되었었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1교시 수험장은 수험생 자식을 보았던 나의 입장에서는 안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아마 오늘과 내일까지 이런 불편함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실 많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합격의 기쁨을 주기는 어려운 시스템이지만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공부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대학에서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 믿는다만
실제로는 때때로 수업도 빼먹고 졸기도 하고
대강 대강 넘어가기도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수능 전 날의 절실함을 기억한다면 못한 일은 없다.
나도 역시 그렇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오늘 저녁 온라인 연구팀 회의 자료를 정독해본다.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서울의 학교에서의 탄소중립을 고민하는 멋진 교사들이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은 미션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정신없이 일해도 좋다.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혈액검사를 하고나면 그 결과를 볼때까지 꼭 이런 마음이 들더라.
그리고는 결과가 괜찮으면 며칠 후 그 감사함을
또 잊는다.
(사진은 오늘의 유일한 외출시 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이다.
참 멋진 배경인데 지하철이 움직이니 사진이 멋지게 나오지는 않는다.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는 꼭 사진을 찍는다.
오늘 몸의 컨디션은 최상이 아니었지만
나의 감성은 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