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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44

배고픔과 화남 사이의 상관관계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전에는 TOEIC 시험 감독이 있었다.

어제 반찬을 해두었으나 세 끼 모두 혼밥한 터라 그대로 뎁혀서 먹기만 하면 되게 해놓고 감독을 다녀왔다.

아침으로는 바나나 1개를 먹었는데 12시 넘어서까지 시험 감독을 하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시험 감독은 멍 때리고 있으면 되는데 왜 배가 고픈 거냐고 물어보신다면

나름 신경쓸 일이 많이 있는 게 시험 감독이라고 답변드리고 싶다.

여하튼 집에 오니 거의 한시가 되어가고 배는 점점 더 고파왔다.

남편은 시어머니댁에 들렀다가 회사로 내려간다고 이미 나갔고(일요일 스케쥴이다.)

집에 있는 아들녀석에게 반찬을 덥혀 놓으라고 하고 싶었으나(그만큼 배가 고팠다.)

자고 있는지 톡을 보지 않았다.

집에 들어와서 토마토소고기스튜, 콩나물잡채를 뎁히고 양배추쌈을 찌고

새로 산 초고추장과 쌈장 포장을 뜯고(요새는 손가락에 힘이 없는지 포장지 뜯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슬프다.)

볶음김치와 두부, 배추김치를 꺼내고 그 사이에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고

자고 있는 아들 녀석을 깨웠다.

나는 배는 고프고 맘은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아들 녀석은 느릿느릿이다.(자신은 여유가 있는거라고 평소에 이야기를 한다.)

밥이라도 푸라고 한 마디 하였는데 그 말투가 곱게 들리지 않았나보다.

큰 접시를 찾으려고 아들 녀석이 주방으로 오니 마음 바쁜 나랑 동선이 겹친다.

한 마디 더 뭐라했더니 급 폭발하였다.

자기는 접시에 밥을 정량 푸고 기타 반찬을 올리는 다이어트식을 한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왜 뭐라고 하는 거냐면서(접시를 가지러 움직였을 뿐이라고)

엄마는 배가 고프면 화를 낸다고, 자기는 알아서 밥을 먹을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나도 지지 않고 말했다.

배가 조금 고픈게 아니라 많이 고픈거라고(이런 일은 많지 않다고)

니가 밥상을 차려서 나에게 대접하는 것도 아닌데 제발 다 차리기 전에 나와서 제 시간에 같이 먹게 해달라고

한 집안에서 각자 밥을 먹는 건 뭐냐고, 나는 혼밥을 싫어한다고...


그러고는 결국 나는 밥을 먹지 못했다. 어제 열심히 했던 음식들이 하나도 맛이 없게 보였다.

배가 딱 막히는 것 같아서 배가 아플게 뻔하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우리 둘이 언성을 높이자 고양이 설이는 무서워서 도망을 갔고(눈치가 빤하다.)

한바탕 큰소리 후에 매일 열어놓는 내 방문을 닫고 들어가 누웠더니 설이가 문을 긁어댄다.

설이를 무섭게 할 수는 없어서 슬며시 문은 열어주었다.

어젯밤 나쁜 꿈을 꾸었었다. 이게 꿈값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조금있으니 거짓말처럼 배가 고픈게 아니라 아파온다.

우리 몸은 AI 이기는 하나 멘탈이 더 중요한 것이 확실하다.

오늘 나는 배가 몹시 고파서 화가 났고(배고픔과 화남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비례 관계일것이다.)

아들 녀석은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저녁 약속이 취소되어서인가?) 기분이 안 좋았던 차에

논쟁의 불씨가 던져졌던거다.

톡으로 슬쩍 화해 아닌 화해는 하였지만 아직 모른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

어째 요새 먹고 싶은 게 많이 생각난다 했다.

이렇게 식욕이 높아질 때 조심했어야 한다.

아들 녀석이 산책을 몇번이나 같이 해준다했다. 무엇이든 최고점이 되면 낮아질 일만 남은 법이다.

오늘 점심을 기점으로 당분간 식욕이 없을 듯 하다. 입맛이 싹 사라지고 위와 등 통증이 시작되었다.

안 싸우면서 사는 가족은 없을테지만 한번씩 싸우고 나면 기분이 너무 나쁘다.

그리고 늙어가면서 불같이 화가 나고 서운함이 오래간다.

점심에 받은 옛 직장 동료의 톡에 미소지었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말이다.

<부장님의 글은 어느날은 비타민이 되고

어느날은 어른의 충고로 들리고

어느날은 같이 동화되어 뭉클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브런치 글 잘 보고 있어요.>

이 글을 읽으면 아하 늙어도 사는 건 비슷하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멋진 늙은이가 되고 싶다는 것은 꿈일지도 모른다. 맵지만 맛있는 충무김밥이 생각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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