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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73

장어 덮밥의 힘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침에 살짝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도 같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을 하늘색이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은

그러나 아직은 더위가 중심인 8월 마지막 주이다.

이 시기에 학교는 다 개학해서 아파트 단지도 오전에는 정말 조용하고

어제 아침 산책때보니(정말 할 일이 산책말고는 1도 없다. 그렇다고 등산은 힘들어서 할 수 없다.)

운동하는 어르신들만 보이는 믿어지지 않는 시기이다.

이제 정말로 힘든 수업이랑 시끌시끌한 과학실과 학교 급식이 그립기만 하다.


집에만 있으니 사람이 점점 멍청해지고 기력도 떨어지는 것 같다.

운동량이 적으니(하루 수업 네 시간의 운동량을 어떻게 따라가랴)

식욕이 떨어지고 먹는 양이 작아지니 화장실 가는 것이 힘들고

자꾸 중간 중간에 짧게라도 낮잠을 자게 되니 저녁잠을 푹 자게 되지 않고

이것들이 악순환이 되는 날들이다.

이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간단하다.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먹는 것이 필요하다.


어제 점심은 나의 1호 제자와 급 약속을 잡았다.

10살 차이가 나는 나의 1호 제자는 고민 끝에 8월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퇴직 선배가 되는 셈이다.

맛난 것을 사주고 싶었다.

아니다. 그 핑계로 내가 기운 차릴 수 있는 맛난 것을 먹고 싶었을 것이다.

장어 덮밥과 스테이크 덮밥을 시켰다.

평소의 나라면 장어는 손을 대지도 않고(미끈덕 거리는 음식을 먹기 힘들어한다. 장어, 연어, 스시류 등의 고급 음식을 잘 못 먹는다.)

더군다나 시키지도 않을 터였지만 지금은 비상시기이다.

스테이크와 장어를 나누어 먹고 힘을 내려 밥 한 공기도 다 먹었다.

어제 먹은 장어는 양념이 적절하여서인지 그리 비리지도 그리 미끈덕 거리지도 않았다.(역시 비싼집이라 퀄리티가 다르다. 비싼데 그 값을 못하는 음식점도 물론 있다. 그러면 마구 화가 난다.)

그리고는 새로 시작되는 백수의 삶에 대한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누기 위해

옆 카페에서 아마도 올해 마지막인 팥빙수도 하나 먹었는데 마냥 달기만 한 그것은 영 별로였다.

집 앞에 팥과 빙수도 직접 만드는 오래된 빙수집이 있다.

그곳에서의 빙수가 올해 첫 빙수였는데 그것과 비교하자니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아마 가격은 비슷했으리라...

그렇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 음식도, 성적도, 재산도, 미모도...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게 살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쉽지 않다.

음식 맛을 높이는 것도 수학 성적을 한 등급 올리는 것도

재산을 쌓아가는 일도 그리고 미모를 유지하는 것도 모두가 다 힘들기만 한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나는 내려가는 일만 남은 나이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인정하는 시기가 퇴직을 앞둔 지금이니 마음이 이리 복잡한 게 맞다.

그래도 어제는 1호 제자와 함께 한 장어와 스테이크의 힘으로 배고프다는 생각이 안든 감사한 하루였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할까나

냉장고에는 고구마, 당근, 오이, 호박, 양배추 밖에 없는데...

모르겠다. 걸쭉한 카레나 만들어 먹어야겠다.

나의 이 글을 가끔 읽는 1호 제자가 어제 한 말이다.

“글 읽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음식 많이해서 많이 드시는 분 인줄 알겠어요.”

아니다. 나는 조금 해서 한 끼 맛있게 적당히 먹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적당히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고민이다.


카레에 사과 반쪽을 잘라 넣었더니 상큼한 맛이 났다. 신김치와 세 숟가락 뚝딱. 맛은 있는데 양이 안 늘어나는게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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