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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생적 오지라퍼 Oct 25. 2024

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90

과한 것보다는 모자란 것이 백번 낫다.

오늘 드디어  태양흑점관측 실험을 모두 마무리했다.

5교시에는 햇빛이 좋아서 지구크기 측정 실험에 필요한 그림자도 길게 잘 생겼고

태양도 잘 보이고 흑점도 2~3개 정도 잘 관측되어서 아름답게 실험을 마무리했다.

빌려온 실험기구를 잘 챙겨서 간단한 선물과 함께 다시 돌려주려 나선 길이었다.

기구가 너무 무거워서 할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담배 냄새가 훅 하고 들어왔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같이 타야하는 택시를 하시면서

담배 냄새가 이리 심하게 나는 것을 모를 수는 없겠고(당사자는 모를 수 있다. 냄새라는 것은 익숙해지면 당사자는 모른다. 고로 담배핀 학생들이 끝까지 잡아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이다.)

을지로 입구에서 정동길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었던가?

숨을 참느라고 참아도 내 폐까지 스물스물 들어오는 담배의 지린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정동길은 이뻤다.

막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가고(이제 시작이더라)

여전히 덕수궁 앞 와플집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로또 명당 1등을 붙여둔 복권집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고

정동축제라고 각종 수공예품 부스들이 덕수궁 돌담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그곳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있어서 나는 정동을 좋아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나의 이전 근무지 학교 정문도 한번 쳐다보았더니 그 시절이 떠올라 뭉클해진다.

이른 저녁을 먹어볼까 살펴보니

오징어볶음집은 브레이크 타임이고

샌드위치와 샐러드집은 만원사례이고

커피집은 야외까지 빈 테이블이 없다.

금요일 저녁이니 그럴만도 하다.

고민없이 추어탕집으로 직진하고 추억의 그 맛을 기대하였으나

아뿔싸,

추어탕은 별로 뜨겁지 않았고

그 맛있게 입에 딱 맞았던 오이무침과 된장 얼갈이 나물무침과 겉절이까지 모두 간이 너무 세서 짰다.

늙어서 내 입맛이 더 순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 식당의 여사님들께서 나이 드셔서 간이 더 세게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나는 세 번의 숟가락질까지만 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나에게 추어탕이란 음식의 선호도를 높여주었던 곳,

나의 단골 맛집 베스트 10에 꼽히던 한 곳을 오늘 이렇게 허망하게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할 수 없이 퇴근길에 빵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하나는 옛날식 소보로빵, 하나는 딸기크림빵이다.

너무 짠 음식을 먹었으니 빵으로 희석하는게 맞다.

그런데 이상하긴 하다.

시어머님은 늙어서 간을 못보겠다면서 자꾸 자꾸 소금을 더 넣으시던데

나는 늙으면서 오히려 너무도 짠 맛이 강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소태라는 말의 뜻을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신기하게 너무 단 것도 매운것도싫어졌다.

부실한 몸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선택인것일까?

무엇이든 과한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나을 것이라 믿는다.

식물도 물을 많이 주는 것보다는 부족한 편이 훨씬 낫더라. 여러 식물들을 죽이고서야 알게되었지만.

자식도 과보호보다는 어느 정도 부족하게 애정을 주는것이 더 낫더라. 다 키우고 지나고보니.

짠 것보다는 싱거운 것,  많이 먹는 것보다는 적게 먹는 것,

담배 냄새에 찌든 것보다는 가급적 안 맡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은 과한 것들을 만난 퇴근길이었다.


아참 과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들 녀석이 출장을 갔다는 것을 알게 된 눈치빠른 고양이 설이가 어제부터 내 침대에 올라와서 자기 시작한 것이다.

자다가 몇 번 설이의 감촉에 깜짝 놀랐다.

나에 대한 애정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되고

설이는 그냥 내 책상위 자기 보금자리에서 자는 것 그 정도까지가 나는 딱 좋은데 말이다.

그러나 걱정없다. 아들 녀석이 돌아오면 거실 캣타워로 복귀할것이다. 아들 녀석이 방문을 여는 순간 튀어나가기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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