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07
똥손과 금손 사이
8만원의 기쁨을 주던 영어능력평가 시험 감독도 오늘이 아마도 마지막인 듯 싶다.
어제 인천행 행사가 힘들어서 목이 따갑기 시작하니 겁이 잔뜩 나서
목을 챙챙 동여매고는 전기담요까지 틀어놓고 일찍부터 누웠고
중간 중간에 일어나서 목감기 시럽과 물을 번갈아 마시고 했더니
그나마 더 심하지는 않고 코가 맹맹하고 목이 마르고 잔기침이 나는 정도이다.
오후 시감인데 조금 일찍 나와서 수행평가 입력을 마무리했다.
수업하다가 짜투리 한 시간 남은 시간으로는
수행평가를 입력하는 것도 시험 문항을 출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감중에 기침이 터지지는 않았다.
마침 아들 녀석이 데이트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과 맞출 수 있어서(고맙기가 그지없다.)
함께 동반 귀가를 하고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와 저녁을 먹고(오늘 저녁이 아마도 두 모자간에 매우 중요한 식사일수도 있겠다.)
두 종류의 김치를 받아가지고 저녁 늦게쯤 집으로 온다고 했다.
무얼 먹을까하다가 날도 춥고해서 집 바로 앞에 있는 단골 음식점으로 갔다.
보통때는 갈비탕을 메인으로 하고 만두를 시키거나, 냉면을 시키거나 하는데
오늘은 좀 색다른 것을 먹자고 한다. 아들 녀석이...
석쇠불고기와 회냉면을 시켰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
지금까지는 석쇠불고기를 먹고 싶었어도 하루 50개 한정에 걸려서 한번도 먹지 못했었다.
언양불고기 형태의 납작하게 지짐식으로 불고기를 구워주는 것인데
불향이 나고 간도 짜지 않아서
회냉면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양파절임을 위에 올려먹기도 하고
오랫만에 먹은 열무김치도 딱 맛이 들어서
목감기 시럽으로 인해 메말랐던 나의 혓바닥에 감칠맛을 주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만둣국을 먹더라.
갑자기 돌아가신 시아버님 생각이 났다.
만두와 송편을 아주 잘 빚으시는 금손이셨다.
그런데 남편은 무지막지하게 똥손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들의 이론은 시어머니가 모든 것을 다해줘 버릇해서 그렇다고 한다.
시어머님이 손이 매우 빠르시긴 하다.
남편의 하는 일을 못미더워하기도 하시고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기도 하신다.
평생을 그렇게 아들바라기를 하셨다.
다행하게도 아들 녀석은 금손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해주기도 안해주었지만
아들 녀석은 어려서부터
레고 매뉴얼을 보고 혼자서 땀을 뻘뻘흘리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던 금손이 맞다.
나는 만둣국과 떡국을 좋아라 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도 별로라 하셨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만두 만드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허리도 아프고 쪼그리고 앉아서 엉덩이도 아팠던 기억 때문이라고 하실 것이다. 아마도...
매번 해서 먹는 음식에는 애증이 담겨져 있다.
그것을 맛나게 먹을 때의 기쁨과 그것을 맛나게 만드는 동안의 어려움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큰 애증의 음식은 김장 김치이다.
김장을 담기 위해서 배추를 나를 때부터 허리는 아팠고
쪼그리고 씻느라 손과 귀와 발가락은 꽁꽁 얼었고
채칼로 무를 썰어대다가 꼭 한번씩은 손이 스쳐서 따갑기 그지없었고
마늘과 양파를 까고 까고 까다가 눈물을 쏟았으나
그리고서 겉절이 하나를 마침내 얻어먹었을 때는
그동안의 모든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는 순간이 있었다.
친정 엄마를 닮아 김치 욕심만 많은 나는
똥손과 금손 사이에서 선택적 위치를 보인다.
내가 하고 싶고 먹고 싶은 음식을 할 때는 금손 비스무리하게 되고
내가 영 하기 싫은 전자 제품을 만질 때는 영낙없는 똥손이다.
오늘 그 누군가의 금손님께서 실력 발휘를 하여 애써서 담근 두 종류의 김치를 가지고 온다니
남편이 반갑기만 하다.
(학교 위 저 감은 참 맛이 있던데
너무 높이 있어서 더 이상은 어째볼 도리가 없다. 금손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