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에 쏟아지는 눈
오늘은 자동차 정기검사 예약일이었다.
맛난 점심을 첫 해 제자에게 얻어먹고(퇴직 선배님이시다.)
길치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빡센 운동을 하고
점심때 차를 찾아왔으니 망정이니
갑자기 눈이 쏟아지는지금
찾아와야한다면 어쩔뻔했나. 다행이다.
퇴근 시간에 딱 맞추어 쏟아지는 눈은
집에서 보기에는 멋지지만
퇴근길에 나서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앙 수준일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난감한 경우와 만나게 된다.
연달아 3일째 성수동 언저리에서 약속이 있었다.
화요일은 서울숲역 근처였고
(너무 추워서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것은
식사 후 집에 돌아오는 택시를 잡을 때 뿐이었다.)
뚝섬역에서 내려 서울숲역까지 한 10분 정도 걸어갔는데
손이 꽁꽁 얼어붙어가는 그 느낌을 오랜만에 느꼈었다.
택시를 잡고 택시가 도착할때까지 그 시간동안에도 발가락이 꽁꽁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수요일 약속은 성수역 2번 출구에서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여유 있는 시간에 도착해서
그 사기 힘들다는 코끼리 베이글도 사고(평소에는 대기줄 인파가 만원이다.)
길을 찾다 찾다 너무 추워서 들어간 카페에서 빵과 커피도 먹고
(공간이 낯설지 않다했더니 작년 여름에 아들녀석과 산책하다가 너무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던 그 카페였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이번에는 너무 추워서
같은 공간을 우연히 방문한 것이다.)
길치임을 감추고 추운 성수 골목을 돌아다녔다.
오늘은 성수역 3번 출구에서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역시나 또 길눈이 어두워서(사람의 역량은 쉽게 높아지지 않는다.)
헤매이고 헤매이다 지칠때쯤
약속한 식당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화요일보다는 수요일이,
수요일보다는 목요일이
1℃ 정도씩은 기온이 올라가는 것 같았고
일단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아서 길을 헤매일만 했다.
생각지도 못한 운동 덕분에
배가 적당히 고파서 점심을 많이 먹었다.
벌크업에 성공했을 것이라 믿는다.
나의 길치 체험 최고의 정점은
오늘 맛난 점심을 먹고
정기검사를 마친 자동차를 찾으러 나선 길이었다.
가끔은 걸어다니던 그 길이었는데
언제나처럼 어디에서부터인가
좌우를 헷갈리기 시작해서
전혀 의도치않게 충분한 겨울 운동을 하고
간신히 목적지를 찾아 귀가에 성공했다.
A/S 센터 도착 5분전쯤에는 이미
점심 먹은 것이 다 소화가 되어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섯시에 칼퇴하겠다는
아들 녀석을 픽업하러 나설 시간이었다.
그런데 30분 전부터 눈이 폭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눈송이가 그리 큰 것은 아니나
속도가 빠르게 쉬지 않고 내리고 있다.
큰 도로를 살펴보니 눈이 얼어붙지는 않았으나 눈을 치울만한 시간을 채 확보하지는 못한듯 보였다.
나의 나쁜 시력과
점점 떨어져가는 운전 실력으로는
이런 대설주의보가 내린 상황에서
서울 교통 흐름에 민폐가 될 수도 있겠어서
아들 녀석 픽업을 과감히 포기하고
맛난 저녁 준비나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오늘 멋진 데이트를 예정하였거나
중요한 약속을 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플랜 B를 고려해봄직한 눈발이었다.
나의 고양이 설이는 눈이 내리는 것에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올해 눈이 내리는 것을 볼만큼 봐서 그럴수도 있겠다.
아니면 고양이는 눈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눈이 오면 엄청 좋아라하면서 뛰어다니던 옛날 우리집 유일한 강아지 백순이가 생각난다.
화요일 서울숲 소품점에서 슬픈 눈이 백순이와
꼭 닮았던 강아지 인형을 보았다.
살까말까를 잠시 고민했다.
눈이 오늘 날 집 앞 마당을 발자국으로 초토화시키던
백순이의 파이팅 넘치는 뛰어다님이 생각나는
눈이 쏟아지는 저녁이다.
오늘 눈이 내린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지구과학 전공자인 나도 점심때까지는 믿지 않았었다.
갑자기 흐려지는 하늘과 함께
그리고 쏟아지는 눈발과 함께
기상청의 슈퍼컴퓨터 능력을 믿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삼십여분 퍼붓고 나더니 슬슬 눈이 그쳐간다.
아들 녀석 픽업을 나설 걸 그랬나 살짝 후회중이다.
아니다. 안전이 최고이다.
살면서 우리는 이렇게 종종 생각지도 못한 난감한 상황과 만나게 된다.
어떻게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안전을 선택하는 것이 최고이다. 잘했다.
그리고 눈 내리는것을 지켜보았더니
졸음이 몰려온다.
커피를 안 마신 효과가 나타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