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레시피 176

양과 질의 차이는 명확하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그 길고 길었던 가을 방학 동안 맛난 것을 무얼 먹었나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한창 나의 체중이 최고조를 향해 가던 젊었던 시절에는

명절 휴가 며칠이 지나고 나면 3kg은 훌쩍 늘어났던 그런 시절도 분명 있었는데

(엄마가 얼굴이 달덩이라고 싫은 소리를 해대셨다. 요즈음은 내가 아들 녀석을 보고 그런다만.)

지금은 한 끼 잘 먹었다 싶으면 다음 한 끼를 먹고 싶어지지 않는 신기한 상태이고

눈바디로는 가을방학동안 살이 쪘을리는 없다고 판단되지만(쪘다면 댕큐이지만)

그래도 한번 되짚어볼만은 하다.


10월 2일(목) : 강의가 없는 나만의 명절 시작일, 뭐해 먹었는지 기억이 도통 나지 않음

10월 3일(금) : 제자들과 돼지고기구이(항정살맛이 났는데 부위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당동 떡볶이와 쿨피스

10월 4일(토) : 시어머님 양로원 다녀와서 집 앞 냉면집에서 남편, 아들과 외식. 남편은 뚝배기불고기 나는 언양불고기, 아들은 회냉면

10월 5일(일) : 후배와 우중 남산~후암동~해방촌 신흥시장 산책 후 매콤가지덮밥과 감태연어롤

10월 6일(월) : 우중 혼자 덕수궁과 정동, 광화문 산책 후 강된장쌈밥과 묵은지회초밥 포장해서 식사

10월 7일(화) : 고터 옷집과 백화점 순방 후 계란불고기덮밥과 전복데친 것 사가지고 와서 먹음

10월 8일(수) : 오랜만에 반짝한 날씨에 평창동 전시장 나들이 후 문제의 <꼬들 라면>이 되지 못한 라면 먹음

10월 9일(목) : 동생들 살펴보고 친구랑 염색하고 돈가스덮밥과 멋진 디저트케익과 차 마심

10월 10일(금) : 새벽 라운딩 후 닭볶음탕 먹음(라운딩 도중에 다양한 간식을 엄청 집어먹음)

그 사이에 곰탕, 소고기미역국, 황태콩나물국, 고추장찌개, 계란탕은 기본 베이스로 나갔었다.


하루 한 끼는 외식을 했고 그 외식만 기억에 남는구나.

내가 한 소소한 나머지 두 끼는 내 기억에도 남지 않는구나.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일을 안한 것은 절대 아닌데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서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이렇게 묻어가게 되는구나.

묻어가는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어쩌면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일상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오늘은 아무런 계획이 없는 날이다.

하루를 온전하게 비워두었다.

물론 내 스타일이 아니고 어떻게 마음과 몸이 바뀔지도 모른다만

오늘도 장마철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드는 비는 또 내리고

해야 할 일들이 이제 코 앞으로 닥쳐와서 아마도 하루 종일 내내 컴퓨터 작업을 해야할 것만 같지만

세상일은 도무지 알수는 없으니

이러다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아들 녀석 소개팅이라 들어오면 좋겠다.)

전문가가 한 맛난 것을 먹게 될지도 모르지만

다음 주 강의 나갈때를 대비한 남편 도시락 반찬을 만드는 일을 해야만 한다.

속칭 냉장고 털이인데 내 주종목이기도 하다.

애호박이 있으니 호박전을 부쳐서 명절 때 못먹은 전 기분을 조금 내볼까?(밀가루도 다 써야하니 말이다.)

가지도 있는데 그 해방식당의 맛났던 매콤가지덮밥을 벤치마킹해 볼까나?

먹어도 먹어도 아직 1/3 남아있는 무로 따뜻한 무밥 만들어 파쏭쏭 넣은 양념간장 비벼 먹을까나?

아침은 감자랑 고구마, 당근 야채 구워 먹을 것이지만

오늘과 내일까지 먹을 것은 충분하지 싶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음식은 아니 인생은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였다는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가을 방학 동안 기억나는 메뉴를 보면 분명하다.

맛났던 것만 특별한 것만 기억에 남는다.

(물론 엄청 맛없었던 것도 기억이 나기는 한다. 화를 동반하여)

앞으로 우리의 삶도 물론 그럴 것이다.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는 세계.

모든 영역에서 노벨상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상의 이름만 없지

시상식이 없고 각광을 받는 정도가 다르고

관심의 정도가 달라서이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의 노벨상은 분명 있다.

그 수준에 올라서는 각 영역별 탑티어들도 존재한다.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내 강의의 고품격을 위해 노력하는 주말을 보내보련다.

그러려면 일단 맛난 것을 먹어야 하는 것이 필수이니 슬슬 냉장고 앞으로 가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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