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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Sep 05. 2023

별수제비

   해가 떴다.

   창틈을 비집고 한 줄기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뒤척이다 양손으로 두 눈을 비볐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시간이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재빠르게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벽에 걸린 앞치마를 챙겼다. 챙 넓은 모자와 장갑은 어머니가 만들어 준 풍성한 앞치마 속에 들어 있으니 준비는 간단했다. 살그머니 어머니 방문을 열었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편안해 보인다. 어머니 방 여기저기에는 바느질감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벽에는 아직도 오색실이 꿰어진 크고 작은 바늘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소리나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영주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제 비가 내렸으니 오늘은 고사리 새순이 불쑥불쑥 솟아올랐을 터였다.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야 고사리를 많이 꺾을 수 있다. 집에서 영주산까지는 십여 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이 길을 4월이면 새벽마다 달음박질 하듯 걸어다녔다. 도로 옆, 무덤을 등지고 언뜻 고사리가 눈에 띄었다. 오늘은 왠지 수확량이 많을 듯싶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고사리 철이면 “똑”꺾이는 촉감으로 인해 온몸은 부르르 희열을 맛본다. 연한 줄기일수록 꺾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해마다 봄이 오면 영주산 근처뿐 아니라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사리 채취에 나섰다. 이맘때면 제주도민 뿐 아니라 관광객과 육지에서 온 이들도 고사리 밭을 헤집고 다니기 일쑤다. 제주로 이주한 후 벚꽃이 필 쯤이면 남에게 뒤질세라 고사리를 찾아 영주산 둘레를 헤매고 다녔다. 

   고사리는 천연자원으로 자본금을 들이지 않고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소득원이다. 더구나 게으른 내 성품에 새벽 걷기 운동으로 이만한 기회는 다시없었다. 정신없이 영주산 입구에 도착했다. 벌써 군데군데 고사리 채취꾼들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주변 길이 어제 내린 비로 질척거렸다. 장화를 신고 있긴 해도 한 발 한 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옷소매로 스치는 풀잎에 맺힌 이슬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싶어 자꾸 신경이 곤두섰다. 

   용암 분출로 흘러나온 마그마가 차가운 공기와 바닷물을 만나 굳어진 탓에 제주에는 돌이 많았다. 특히 영주산 주변의 오름과 밭에는 온통 돌무더기뿐이다. 비가 오면 금방 땅속으로 스며들어 주변은 건천이 되어 버린다. 영주산 일대는 억새가 많이 자라고 있다. 그래서일까. 새순이 움트는 봄이면 조금만 비가 내려도 바윗돌을 덮고 있던 검은 흙들이 질퍽질퍽 밟히며 늪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만큼 영주산 일대에는 제주에서 보기 힘든 민물 웅덩이가 많았다. 

   허리를 굽히고 옹기종기 솟아있는 고사리 무리에 정신이 팔릴 

때쯤이었다

.


근처에서 말이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사방을 둘러봤다

인기척도 없는 산언저리에서 말의 가쁜 숨소리가 점점 거칠게 들려왔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그곳으로 다가갔다

갈색의 어린 말 한 마리가 늪지에 미끄러져 한쪽 발이 빠진 상태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은 버둥거릴 때마다 몸의 중심을 점점 잃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장화발로 다가가 쓰러진 말을 세워보려 했지만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어린 말은 크고 검은 두 눈을 껌벅거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두면 말은 계속 허우적거리다 지쳐 숨을 멈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19에 전화를 했다. 문득, 산 정상에서 근무하고 있는 산불지기 어르신이 떠올랐다. 그라면 이 상황을 도와줄 수 있을 듯싶었다. 앞뒤 잴 틈 없이 몸은 영주산 정상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나무로 설치된 계단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관광객들이 ‘천국의 계단’이라 부르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낮은 산 너머로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함께 희망과 꿈과 사랑이 펼쳐져 있을 듯한 분위기이다. 한가롭게 파릇한 새순을 먹고 있는 한 무리의 소들 사이로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분명했다.

   “여기요!”

   “무슨 일 있어요?”

   그의 음성이 쩌렁쩌렁 영주산을 울렸다.

   “어린 말 한 마리가 늪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어요.”

   덩달아 큰 소리로 대꾸를 했다. 그는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왔다. 

   “저기예요!”

   내 소리와 동시에 그의 시선은 지쳐서 옆으로 꼬꾸라져 있는 말을 훑어보고 있었다. 말은 두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이 쓰러진 곳까지는 어제 내린 비 탓에 진흙 뻘밭이었다. 푹푹 빠지는 밭두렁에서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던진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늪으로 뛰어들었다. 고함과 함께 말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도움을 요청한 소방대원들도 다가와 합세했다. 말은 발버둥치다 더 깊숙이 빠진 발을 주체 못해 쓰러져 버린 듯싶었다. 얼마나 버둥거렸는지 지친 말은 숨이 멎은 듯, 두 눈을 감은 채 꼼짝 못했다. 그들은 맨손과 삽으로 뻘흙을 파기 시작했다. 말의 발이 서서히 드러났다. 장정 서너 명이 네 발을 잡고 기합 소리와 동시에 들어 올렸다. 풀밭에 널브러진 말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흔들자 부시시 눈을 떴다. 

   “살았다!” 

   모인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혼미한 정신 상태로 게슴츠레 사람들을 바라보던 맑은 눈동자가 안도의 숨을 쉬게 했다. 모두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진흙탕에 빠지는 발을 주체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바람 앞에 등불처럼 목숨이 꺼져가는 말의 구명을 위해 사력을 다했으니 뿌듯할만 했다.

   그때서야 내 앞치마가 풀어져 사라져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둥지둥 산을 오를 때 찔레나무에 걸렸을지 모른다. 오늘 새벽 고사리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왠지 억울하지 않았다. 파란빛이 선명한 하늘에서 시원한 바람이 날아와 얼굴을 때렸다. 기분이 상쾌하게 좋아졌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햇볕을 받고‘생명존중’이란 어휘 하나가 길게 별수제비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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