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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Sep 05. 2023

어제 너머 과거

   오래전. 

   삐삐로 연락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속였다. 약속다방에 앉아 속절없이 DJ만 쳐다보며 기다렸다. 현란한 음악다방 한쪽 벽에 동그란 벽시계가 보기 좋게 걸려 있다. 시계와 눈이 마주치면 자존심이 폭삭 뭉그러져 내려앉을 듯싶어 애써 외면했다. 5분쯤 지났겠지. 아니야! 내가 약속시간 보다 5분 빨리 도착했으니 10분은 지났을 거야. 열 셀 동안 나타나지 않으면 일어나서 가야 해. 마음 속 초침은 느리게 소리를 냈다. 

   “금방 올 거야, 기다려!”

   ‘째깍째깍’ 머릿속에서 더 느리게 시계가 움직였다.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른다. 이 곡이 끝나도록 오지 않으면 난 간다. 되뇌이고 뇌이던 순간, 언제나 그가 다방 문을 밀치며 허겁지겁 뛰어들어왔다.

   연애시절. 1분의 기다림도 그에게 허용해 주고 싶지 않았다. 도도한 척, 설레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던 이십대의 오만은 늘 지니지 못한 시계를 탓했다. 손목시계가 없어서 버스 시간을 놓쳤어. 시계가 없어서 늦잠을 잤지. 그렇게 핑계를 대는 날이 많아져도 그는 웃었다.

   “이 달 월급 타면 예쁜 손목시계 선물해 줄게.” 

   그 시절, 나를 지배하던 화두는 ‘느리게 살자’였다. 느긋하게 살려면 시계 따위는 필요 없다며 객기를 부렸다. 시계를 탐하면 욕심을 부리게 되고, 욕심은 화를 부르니 시간의 노예가 되지 말자. 어리석은 내 역설에 번번이 그의 말은 무시당해야 했다. 내세울 변변한 자격증도 소지하지 못한 채, 이력서만 들고 다니던 한가로운 시기였다. 직장을 다니던 그는 바쁜 틈틈이 연애 상대가 되어 주느라 시간을 쪼개며 분주하게 살았다. 입으로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삶을 살겠다 말했으나, 정작 그와 만날 때마다 뾰족한 자존심이 날을 세우곤 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흔한 손목시계 하나 지니질 못했다. 여름날, 짧은 옷을 입은 친구들의 손목에는 예쁜 시계가 햇볕을 받아 반짝거렸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 선물 운운 하던 친구들의 시계를 찬 손목은 볼수록 하얗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언니와 동생들 사이에서 일찍 철이 들어 버린 나는 처세술에 능했었나 보다. 박봉으로 살아가는 부모님에게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사 달라고 졸라 본 기억이 없다. 대신 이해하기 힘든 궤변으로 알량한 속내를 감추기에 바빴다. 

   어느 날 그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성」이란 그림 화보를 보여 줬다. 그림을 보는 순간, ‘초현실주의’란 말만으로도 충격이었다. 달리의 그림 속에는 잎 떨어진 마른 나무 줄기에 시계가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뜨거운 태양을 견디지 못해 녹아내리듯 흐느적거리는 시계들이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처럼 널브러져 시선을 자극했다.

   “달리 그림 좋아할 듯싶어서···.”

   그는 내 위선적인 속성까지도 눈치채고 있었던 듯싶다. 천천히 느림보 거북이처럼 사는 일이 내 생활신조라기보다 시계 하나 살 주변이 되질 않았고, 부모님께 선물 받거나 조르거나 하기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는 열심히 달리 그림을 설명했다. 달리와 아내 갈라의 심장을 활활 태우는 듯한 사랑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다. 남편이 있던 유부녀 갈라를 아내로 맞이하며 달리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평안을 느꼈다고 한다. 한 여인을 삶의 지지대로 의지하며 순수 예술혼 자체를 불태웠다고 이야기할 땐 말이 빨라졌다. 그들의 열정과 순정이 결실을 맺어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했고, 달리의 지고지순한 갈라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마음과 동일하다 했다. 

   그림 속 오브제가 상징하는 뜻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꿈속 세계를 흑백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사진처럼 부드럽게 가슴을 파고든다. 시간은 기억의 흐름을 영원히 지켜내는 일이라고 시계들은 외치다 못해 지쳐버린 듯하다. 사각의 틀 속에 갇혀버린 공간은 머릿속에서 무한대의 장소를 연출하고 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계 속 시간들은 기억만 내장하고 있지 않은 채, 미래의 시간까지 저당 잡고 있는 듯 보였다. 공간과 세월의 모호한 의미가 시나브로 겹쳐진다. 

   시계가 말하는 시간의 속성을 정교하게 그려낸 달리의 예술성이 볼수록 흥미로웠다. 꿈꾸는 듯 몽롱한 그림 속 분위기는 부도덕한 사랑을 쟁취한 괴팍한 예술가의 혼이 서러움으로 표현 되었는지도 모른다. 갈라를 모델로 하며 달리가 꿈꾼 현실은 시계의 바늘 침이 가리키는 숫자와 소리의 향연으로 빨려들어가는 세월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상과 소원은 작고 소중한 기억들의 교집합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몽환적인 세계가 분명했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몸 전체를 휘감는 전율에 부르르 떨었다.

   내 반응이 달리의 그림과 합을 이루는 낌새를 그가 느꼈을까. 작은 꾸러미 하나를 슬그머니 내놓았다.

   “성과급을 탔거든···.”

   그가 내민 상자 속에는 작고 앙증맞은 큐빅이 테두리에 원을 그리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모든 변명을 묵살 시켜 줄 손목시계였다. 혼돈의 시기를 보내던 한 여자의 시간들은 귀하고 소중한 선물에 멈춰 버렸다. 

   그로부터 함께한 시간이 벌써 삼십칠 년째다. 사랑은 시간을 타고 기억을 저장한 채, 달리처럼 내게 머물러 있다. 또한, 어제 너머 과거가 되어 버린 이야기 속에서 시계의 초침은 째깍째깍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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