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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Sep 05. 2023

슬픈 엇박자

   그녀의 딸은 울먹였다.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무섭고 두렵다고 했다.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엄마 때문에 전화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다니 당황스러웠다.

   “식사도 하지 않고, 밖에도 나가지 않으세요.”

   엄마가 무릎 수술을 받은 이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없게 되자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혼자 얼마나 황망했으면 내게 전화를 했을까. 덩달아 걱정이 앞섰다.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작년에 보내 준 칸나가 새순을 삐죽삐죽 내밀며 넓게 초록 잎을 만들 무렵이었다. 자랑삼아 사진을 찍어 보냈다. 벌써 응답이 와야 옳을 일인데 묵묵부답이라 궁금증이 발동했다. 전화벨의 긴 신호음이 끊길 때쯤, 모기소리보다 더 기어들어가는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다 귀찮아요. 다음에 만나요.”

   내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가슴에 ‘쿵’ 바윗덩어리가 굴러와 박혔다. 딸이 백일도 되지 않을 시기에 남편을 잃고 택시 운전과 토스트 장사를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친정에서는 장녀 역할을 하느라 응석 한 번 부리지 못했다. 하나뿐인 딸에게 부모 노릇하느라 한눈 팔 시기도 놓쳐 버렸다. 그녀는 홀로 자란 딸이 자기 죽으면 누굴 의지하겠냐며 시집보내기를 갈망했다. 그런 엄마 생각과는 달리 딸은 똑똑하게 자라 준만큼, 연애하는 친구들에게조차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엄마 소원과 딸의 소원은 극명한 대칭을 이룬 채, 오늘을 살아왔다. 

   오랜 세월 그녀를 지켜보면서 ‘행복’ 이란 단어에 자꾸 물음표를 던져야 했다. 여자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현모양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일상은 누구나 바라는 꿈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부부라도 함께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한평생을 다정하게 지내다 즐거운 마음을 지닌 채, 늙어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연 맺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허리며 다리가 이유 없이 아프다고 했다. 누구에게 맞은 적도 없는데 자꾸 쿡쿡 쑤시고 결린다며 딸에게는 말하지 못할 아픔을 내게 털어 놨다. 그럴 때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아플 수 있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되뇌었다. 몸뚱이가 아파올수록 그녀는 밤마다 꿈을 꾼다고 했다. 꿈속에서 몸이 깡마르고 가파른 여인이 동틀 무렵이면 자기 이불에 흥건히 하혈을 해댄다고 투정을 부렸다. 이부자리에 붉게 물든 핏자국과 창문으로 들어온 아침 해가 소름끼치게 만들었다며 악몽이냐고 물어 왔다. 어둠이 밀려오면 온몸이 얼굴도 없는, 몸도 없는, 형체도 없는 그림자들에 묶여 더욱 아파와 싫다고 도리질을 쳤다.

   오직 딸만 바라보며 살던 그녀의 아픔과 우울증이 일흔 다섯 해 동안 견뎌온 엇박자의 삶이라면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오고 가지 않던가. 그 흐름 속에서 온전히 자기 몫을 차지하려면 부단한 노력과 열정이 필요할 듯싶다. 그녀가 그동안 살아온 순간들이 시간과 비례되어 진정한 내면을 만들어 냈을 일인데 자꾸 슬픔이 엿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져 왔지만 유독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궁금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이가 몇 살인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늘 알고 싶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무량(無量)의 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터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쇠퇴와 소멸의 주기를 겪는 과정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곤충이나 모두 한 생애가 다르지 않을 일이다. 우리 안의 시간은 우주에서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부분일 수 있지만, 개인의 일생에 견주어 보면 소중하고 위대한 시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시간은 양이 아니라 질 일진대 간혹 우린 간과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그녀의 딸은 남편처럼 아버지처럼 늘 곁에 있어 왔다. 입버릇처럼 딸의 결혼을 노래했고, 손주 손녀와 노는 상상을 해 온 그녀 소원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걸까. ‘내리사랑’을 뼈저리게 느낀다는 그녀의 딸은 결국 어머니에게 남편 노릇도, 아비 노릇도, 애인 노릇도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세상 이치는 늘, 남 하는 짓 다 해봐야 후회하지 않는 행동임을 눈으로 피부로 느끼게 해 준다. 태어나 나이를 먹고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피해 갈 수 없지 않은가. ‘늙음’에 순응하는 일은 또 다른 자기 성찰에 도달하는 길일 게다. 나이를 먹으면 모두 아이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그러기에 ‘아이가 된 어머니’를 ‘어른이 된 자식’이 보살필 수 없다고 노래한 김용국 시인의 「어머님이 아이가 되는 날」이란 시(詩)에 긍정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녀 뿐 아니라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보상 받을 수 없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한 부정을 하며 살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한 무릎과 허리가 저절로 나을 날은 없겠지만, 어머니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하루 빨리 우울의 늪에서 기지개 켜고 나오길 영겁의 세월에 기대 보는 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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