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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Sep 13. 2023

환생을 들려주는 바람소리


  은둔의 왕국에 도착했다.

  히말라야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파로공항은 바람을 가둬두기라도 할 듯 고요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바람風은 모든 사람의 간절한 바람望을 간직한 채, 골목과 거리와 허공을 쓸고 다녔다. 부탄이란 나라는 ‘신들의 정원’ 혹은 ‘벼락 치는 용의 나라’라고도 한다. 부탄은 히말라야산맥 한가운데 푹 파묻혀 수 세기 동안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며 대승불교의 전통을 지켜 왔다. 국기에 그려진 용 한 마리가 여행객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원피스로 된 전통 복장인 ‘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가이드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반겨 준다. 그는 맑고 선한 눈을 커다랗게 뜨며 수줍은 듯 자기소개를 했다. 부탄에서의 첫 인연이다. 악수로 맞잡은 그의 손이 유난히 따뜻했다.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소용돌이를 만든다. 손을 잡고 흔드는 순간, 저릿한 기운이 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저었다. 아찔한 전율이 부채살처럼 퍼지는 햇살을 가로막는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젊은 청년을 바라봤다. 해맑은 표정으로 눈 맞춤을 하고 있다. 그가 서 있는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길을 만들며 옷자락 마디를 여미게 한다. 

  “저는 한국에 있는 경희대에서 유학했습니다.”

  그의 음성은 현악기 울림처럼 부드럽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말을 할 때마다 얼굴 가득 피어나던 미소는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다. 까무잡잡한 피부조차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하고 다정한 이미지다. 어디서 봤을까.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다리를 모으고 버스에 앉아 있는 그의 그림자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검정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부동의 자세로 인해 가늘게 보였다. 여자들 치마 같은 전통 의상은 다리를 벌리고 앉는 남자들의 무례한 몸동작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더욱 겸손해 보이는 옷매무새다. 자꾸 그에게 시선이 갔다. 나를 피하지 않으며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화답해준다. 덩달아 따라 웃었다. 

  ‘언제 만난 듯 익숙한 얼굴인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를 만났을 리 만무하다.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왔지만 내가 사는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활동하던 영역도 전혀 달랐다. 하물며 나이 차이도 많지 않던가. 그의 웃음이 또 나를 향하고 있다. 현재의 삶에서 그를 만난 일이 없다면 전생에 인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어놓는다. 그와 내가 전생에 부모 자식이었거나, 부부의 정으로 혹은 연인 사이로 만났을지 모를 일이다. 

  왜 각별한 사이였던 인연으로 의식되는지 알 수 없다. 부탄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이 나를 과거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듯싶다. 아니면 부처님께서 그와 나를 맺어 주고 싶어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걸까. 훅, 밀려오는 예상치 못한 힘은 내 사고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분주했다. 그때였다.

  “꼭 어머니처럼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요.”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린 채 말을 건네 왔다.

  화엄에서는 모든 일이 될 수 있다는 절대 긍정을 통해 연기법의 연멸緣滅을 가르치고, 반야, 중관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절대부정을 통해 연기법을 가르친다. 화엄의 법계연기는 사사무애事事無碍 연기라 했다. 사사무애 연기는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로 하나가 곧 무한이요, 무한이 곧 하나다. 그러기에 내가 항상 존재하는 곳에서 관계 맺은 인연은 저기 아니면 여기 사이에서 생사를 떠나 조화를 이룬다하지 않던가.  

   어느덧, 그와 함께 향하고 있는 곳은 ‘푸나카’였다. 그곳에는 부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푸나카 종’이 남녀 화합의 의미를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의 강인 포추와 어머니의 강인 모추가 합쳐지는 길목이다. 그곳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지나던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사원이 ‘푸나카 종’이다. ‘종’이라 불리던 사원은 정치를 관장하는 관공서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승려들이 기거하며 국책을 의논하고 결정했던 성과 같은 건물이다. 줄지어 서 있는 나무숲과 소박한 기원을 담은 기도문이 룽다와 타르쵸의 깃발 사이로 펄럭펄럭 바람 소리를 들려준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경전의 소리를 듣고 싶어 두리번거릴 즈음 광장 안쪽에 자리한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손짓한다. ‘지금 처한 상황에 만족하라’ 쵸르텐을 앞에 두고 보리수나무는 탑돌이 하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달린 또 하나의 눈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설파한 보리수나무는 편안하고 안온하게 그늘을 만들며, 얻을 것은 무엇이고 잃을 것은 무엇인지 조용히 물어온다. 

  내 인생의 행선지는 어디인가. 극락이란 괴로움이나 불행 없이 항상 즐거움과 행복만 가득한 세계라 했다. 그래서 누구나 극락을 찾고 원하는 걸까. 현재라고 하는 지금은 시간이며, 시간이란 변화일 터이다. 과거는 변화가 완료되어진 상태이다. 현재란 변화하고 있는 시점이다. 미래란 아직 변화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기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푸나카 종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던 나무다리를 건널 때, 그가 불러주던 노랫가락이 애절하게 가슴을 휘감는다. 

  푸나카라는 지역은 남자 강과 여자 강이 만나는 장소이다. 남자 강에 터전을 일군 물고기는 잘 생겼고, 여자 강에 살던 물고기는 예뻤다. 잘생기고 예쁜 둘이 만나 사랑을 하자 누군가 방해를 한다. 헤어졌다 다시 만난 둘은 인연법에 따라 여러 가지 사연을 간직한 채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게 된다. 아마 푸나카 종에서 들려오는 불경 소리를 듣고 그들도 참회와 참선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끊어질 듯 이어지던 한 소절 한 소절이 마음을 후벼 팠다. 노래를 끝낸 그가 내게 질문을 했다.

  “환생을 믿으세요?”

  꼬불꼬불 좁고 비탈진 비포장 길을 곡예 하듯 달리는 미니버스 속에서 였다. 25살 앳된 청년이 환생을 물었다. 부탄은 대승불교 사상을 모태신앙으로 따르고 섬기는 국가였다. 국민의 90%가 불교를 종교로 삼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출가를 준비했다고 한다. 출가가 그리 쉬운 결심은 아닐 터인데 한창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가 승려를 꿈꿨다니 놀라웠다. 행복지수가 세계 1위인 나라에서 승려를 꿈꾸는 청년은 외국인의 호기심을 자극 할 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 우수학생으로 뽑혀 외국 유학까지 무상 혜택을 받은 그였다.

  “저는 환생을 믿어요.”

 움직이는 버스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전생을 이야기했다. 조선시대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살다 부탄에서 환생한 탓에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 학자 아니면 승려이었을까. 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나와 인연도 전생 업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라면, 그의 환생에 대한 믿음을 내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육신보다 영혼을 중시한다는 대승 사상이다. 그러기에 육체보다 정신을 우선하고 불법을 깨닫는 일이 곧 윤회를 끊는 일이라 생각한다. 환생불도 그들에게는 모든 일에 영험함을 보이며 정신적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 높은 산악지대에 터전을 일구고 살아오는 동안 울창한 숲은 맑은 공기와 풍부한 수량을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바람은 부처님 말씀을 모두에게 실어 나르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다. 학식과 덕망을 고루 갖추고 중생들의 바른 생을 인도하던 린포체가 죽음 후에 다시 어린아이로 환생한다. 린포체는 예전의 능력을 되살려 중생구도에 매진한다.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환생불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에 대한 원력을 믿고 신성시할수록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진다면 바람이 전해주는 경전 소리를 굳이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대는 전생에 어느 절에서 살았지?”

  “경주에 있는 불국사예요.”

  또다시 바람이 스르륵 소리를 낸다. 얼굴을 스치고, 코끝을 간질이며, 귓불을 쓰다듬는다.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모락모락 향불이 타오르며 소리없는 울림이 너울춤을 춘다.

  그는 꿈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고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았으니 욕심도 버리고 마음까지 내려놓는다 했다. 하심下心을 깨닫고 탑돌이를 하며, 오체투지로  고행을 깨달았다니 그도 부처일까. 구호단체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몸이 바람 소리를 들었는지 가늘게 흔들렸다. 

  “한국에 가면 적멸보궁 다섯 군데와 불국사에 꼭 가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선뜻 안내를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전생이 ‘김대성’이었다며 엷은 미소를 흘렸다. 환생을 믿는다는 부탄 청년이 불국사와 김대성을 이야기한다. 김대성은 신라시대 재상이 아니던가. 김대성은 경덕왕의 명에 따라 불국사를 다시 짓고 석불사(훗날 석굴암으로 이름이 바뀜)를 새로 지었다(774년 완공)고 전해 오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은 전생에 경주 모량리의 가난한 여자 경조의 아들로 태어나 품팔이를 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의 이익을 얻으리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품팔이로 마련했던 밭을 시주한 뒤 죽었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전생의 어머니 경조도 모셔 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부자보다 가난한 이의 시주가 더 큰 인과응보의 결과를 얻어냈으니 불교로 귀의한 김대성은 사찰 불사에 큰 힘을 보탤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았겠는가.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기계적으로 습득한 지식을 버리고 처음 태어날 때와 같은 순진무구함으로 돌아가는 길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부탄에서 가이드를 하는 그가 신라시대 김대성이었다면 현재 나의 전생은 경조였을까.

  부처님의 말씀이 연기로 남아 룽다에서 타르쵸로 초르텐으로 전해지는 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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