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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Oct 17. 2023

꺾인 건 고사리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네

        

  꽃바람이 분다. 

  동백인가 했더니 제주 토종 수선화가 하얀 이파리를 뽐낸다. 언뜻언뜻 유채도 노란 향기를 만들어냈다. 그 찰나를 붙잡고 벚꽃도 화려하게 시선을 잡아끌며 봄날을 유혹한다. 빨강과 하양과 노랑의 색깔이 형형 빛깔을 자랑할 즈음, 제주도는 고사리 새순이 삐죽빼죽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이웃들은 꽃구경 대신 고사리 수확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분주해진다.

  해마다 4월이면, 제주사람 두서너 명만 모여도 고사리가 어디에 나기 시작했는지 탐색전을 벌이며 정보를 공유하려 한다.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서너 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고사리에 얽힌 일화를 여러 번 들어온 터였다. 올해는 꼭 고사리 채취에 동참해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새 봄에 돋아나는 산나물이라든가 쑥이라든가 냉이를 채취해본 적 없었다. 말로만 듣고 마트에서 사다 요리를 해먹는 일이 전부였다. 적어도 제주에 정착하려면 고사리 수확은 해봐야 한다는 지인의 말에 고무되어 새벽마다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오름 주변은 날마다 고사리에 대한 내 기대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돌 틈에서, 억새 숲 사이에서, 가시덤불 속에서 갈색의 길고 통통한 줄기를 발견할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여기저기 엄청나게 자라고 있는 여러해살이풀인 고사리는 봄철을 유혹하는 양치식물이다. 1m의 높이로 자라는 특성 탓에 톡톡 꺾을 때면 신명이 절로 났다. 고사리는 이른 봄에 뿌리로부터 싹이 돋아나 끝 쪽에서 꼬불꼬불 말리며 아기 주먹을 닮아간다. 새끼손가락만큼 굵은 몸통을 꺾을 때면 짜릿한 손맛이 느껴져 천하를 얻은 듯 통쾌했다. 

  몸통은 흰 솜 같은 털로 온통 덮여 있다.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사리를 한 줌 꺾어들고 뿌듯해할 즈음 쫄랑쫄랑 따라왔던 딸아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불쌍해라. 허리가 ‘뚝’ 꺾일 때 얼마나 아플까요?”

  아이 말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주먹 안에 있던 고사리들이 각자 소리를 질러대는 듯 흔들렸다. 동시에 팔목도 몹시 저려왔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터라 무심코 던진 아이 말을 듣고 곱씹게 되었다.

  봄이면 제주도 들판 곳곳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연산 고사리가 돋아난다. 날마다 식용 고사리 채취꾼이 늘어나면서 사고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다. 억새 숲과 찔레 넝쿨 사이를 유심히 살펴만 봐도 길고 통통한 고사리밭을 발견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난생처음 고사리를 찾아나섰을 때는 발 앞에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는 차를 타고 좁은 길을 지나가도 눈에 번쩍 들어오곤 한다. 하나하나 발견하는 기쁨도 배가 되었다. 허리를 끊을 때 들리는 ‘똑’ 소리의 경쾌함은 묵은 체증까지 날려버리며 촉각을 자극했다. 그 재미에 빠져들수록 머릿속 모든 생각들은 정지해버린다. 몰입의 즐거움에 손놀림과 눈회전이 바빠졌다. 지인들은 그런 나를 보고 ‘고사리 헌터’라고 놀렸다. 그런데 오늘 아이와 함께 나온 들판에서 혼자 즐기던 놀이에 방해꾼을 만난 셈이 되었다. 

  아이는 따라오며 또 종알거렸다.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한 할머니는 고사리철이 정말 싫다고 해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내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당혹스러움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반대로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T. S. 엘리어트가 노래했지만, 제주에서의 4월은 고사리철의 시작과 동시에 4·3사건이란 아픈 기억이 회자되는 달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혼자 들판을 헤집고 다닐 엄마를 돕겠다며 따라온 딸아이다. 아이는 고사리가 허리를 잘려 아프겠다고 하더니 4·3사건까지 들먹인다. 어느 할망은 젊은 시절, 고사리 채취를 나온 자신을 마중나왔던 아버지가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사연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만든다.   해가 거듭될수록 4·3사건은 제주도민들의 아픔으로 부각되었다. 더구나 고사리는 4월을 장식하는 봄꽃과 함께 전국을 술렁이게 만들지 않던가. 그 일에 덩달아 일조를 하고 있으니 딸아이가 아니었다 해도 싹 틔우고 잎 키우는 일에 온 힘을 쏟았을 고사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내내 몸살을 앓았다. 미열이 온몸을 달뜨게 했다. 고사리를 꺾느라 힘들고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잔인한 4월이면 모두에게 소유의 행복을 맛보게 해준 여린 식물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스스로 만들어가는 재주가 있지 않던가. 가지려는 욕망의 부질없음을 깨우치는 순간, 꺾인 건 고사리가 아니라 내 마음 속 소유욕이었다. 내어줄 수 있을 때 나눠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부자로 사는 길일까. 뜨거운 햇살에 제 몸의 수분을 다 내주고 소들소들 말라가는 고사리에게 사랑한다, 또 사랑한다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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