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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명진 Oct 17. 2023

오르다

        

  땅의 주인이 내놓은 길. 

  그 길 따라 1,950m 정상을 향해 걷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은 당연히 한라산이다. 한라산은 은하수를 어루만질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록담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걸쳐져 있다. 

  새벽 6시쯤 성판악에 도착했다. 알싸한 12월의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지난 번 사라오름까지 올랐던 기억이 파노라마를 만든다. 이번엔 정상 도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입산을 하려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입구는 한산한 편이었다. 겨울 산행을 즐기려는 몇몇과 함께 무리를 만들며 스틱을 힘 있게 잡았다.   한 발 한 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산의 정령들께 기도를 올렸다. ‘부디 허락하여 주소서, 무사히 정상까지 가는 길을 열어주소서.’ 언제부터인가 산을 오를 때면 산의 신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영험한 기운과 전설이 깃든 산길을 걸으며 신의 허락을 구하는 마음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경배라 믿었다. 그만큼 한라산은 오르는 사람들과 산재한 자연 풍광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더구나 겸허함까지 일깨워주는 신령함도 계곡마다 도사리고 있다. 

  한라산은 화산회토로 구성되어 있어 빗물이 쉽게 스며드는 특성이 있다. 제주도는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홍수가 나지 않는다. 한라산에서 시작되는 대부분의 골짜기와 계곡은 평소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탐라계곡, Y계곡, 효돈천, 산벌른내계곡 등은 장마철에 폭우가 내리면 물이 불어 사람이 지나지 못할 정도로 급류를 이룬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한반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특히 백여 차례 이상 일어난 화산 활동으로 한라산에는 ‘오름’이란 기생화산이 형성되었다. 백록담을 중심으로 서북쪽으로 장구목, 윗세오름, 어승생악, 망체오름, 큰두레왓, 삼각봉, 동쪽으로는 사라오름, 흙붉은오름, 돌오름, 성널오름 등이 빙 둘러싸고 있어 이국적 풍경을 보여준다.

  앞사람의 등을 보며 뒤질세라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가끔씩 맵찬 바람이 나뭇가지와 키 작은 풀들을 흔들며 앞장서서 달아났다. 12월의 고추바람이 울긋불긋 등산복 입은 사람들을 시샘하려는 듯, ‘휘릭 휘릭’ 소리를 내며 심술을 부린다. 사람들은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단단히 채비를 했다. 등산복과 등산화에 어울리는 모자를 썼고, 장갑을 낀 채, 스틱을 들었다. 완벽한 준비를 하며 맞이한 여정이 인생길이라면 실수와 후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터다. 묵묵히 산을 오르는 앞사람의 배낭 무게가 갑자기 쌀 한 가마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남의 배낭 무게와 내 짐 무게가 몸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어깨에 매달린 배낭이 내 삶의 무게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배낭의 무게가 허리를 압박하고 두 다리까지 무겁게 만든다. 자꾸 혼란스러워진다. 미련없이 벗어놓고 싶었다. 배낭만 내려놓으면 사뿐사뿐 산을 오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에 고개는 도리질치고 만다. 정상을 향해 시작한 행보를 늦추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솟구친다. 지금 못 오르면 한라산은 영영 내게서 멀어질지도 모른다. 신의 정령들도 다시는 내게 눈길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옆의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00m의 거리가 이렇게 멀고 힘들었던가. 가쁜 숨소리가 턱을 막는다. 이제 발끝만 보며 걸음을 옮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질 않아 돌아서고 싶은 충동에 또다시 휩싸일 즈음이다. 진달래밭 대피소 이정표가 반갑게 다가왔다. 이곳을 12시 전에 통과해야 했다. 새벽에 성판악을 출발한 지 다섯 시간이 훨씬 지났다.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다행이다’ 외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정상을 향한다. 여기까지 해냈으니 나머지 코스는 문제없겠지. 스스로를 달래며 주변을 훑어봤다. 손이 시렸다. 갑자기 눈발이 날린다. 오늘 날씨 ‘맑음’을 확인했지만, 지금은 먹구름이 먼저였다. 

  하루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이기도 하는 신비롭고 순수한 모습이 본래의 자연이던가. 정상에 근접할수록 날씨는 변덕을 부린다. 걸음을 빨리할 수 없는데 몸은 급하다고 자꾸 신호를 보내온다. 앞서가던 한 가족 중 딸아이가 그만 하산하자며 칭얼거렸다. 도란도란 격려하는 엄마의 목소리도 얼어붙었다. 

  높은 절벽과 깎아놓은 듯한 비탈 사이로 진달래군락과 구상나무군락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눈 덮인 백록담을 상상하며 고사된 지 오래된 구상나무 가지에 피어나기 시작한 눈꽃을 바라본다. 눈 속에 잠긴 한라산을 배경으로 드넓게 펼쳐진 설원 속 나를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 앞에 놓인 계단은 천국과 지옥을 노래했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이제 곧 한라산은 ‘겨울왕국’의 풍광을 자랑할 시기이다. 검은 현무암과 푸른 상록수, 붉은 마가목 열매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쌓일 하얀 눈송이는 설산의 절경을 뽐낼지 모른다. 이미 정상을 덮고 있던 흰 눈 위에 또 눈이 내려 쌓이면 여린 나뭇가지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질지 모른다. 바람보다 강한 힘과 무게를 지닌 눈송이다. 사람들 삶도 타협을 모르는 강한 성품이면 금세 꺾일지 모른다는 이치를 새삼 깨달았다. 

  드디어 정상 도착.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그들이 맛본 성취감은 인생살이에 희망찬 획을 그어놓을 일이다. 서로 마주하며 웃는 얼굴 사이로 솜털 같은 함박눈이 둥실둥실 춤사위를 펼쳤다. 

  온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려는 듯, 눈송이는 나뭇가지마다 순백의 상고대를 만들어놓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백록담의 고요한 정취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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