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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삭제된 39시간 50분

마이너리티 다큐멘터리스트의 임무

"우리가 해보는 것 중에는 잘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잘 모르는데 그냥 해보는 것도 많잖아. 평생 눈 감을 때까지 난 사랑이 뭔지 모를 것 같아. 하지만 앞으로도 사랑할 거야."


- 오늘의 인터뷰에서





며칠간 본격적으로 다큐 촬영을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나보다. 나도 몰랐는데. 세상과 불화하는 생생한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압축해놓았던 감정이 더는 작게 눌린 채로 버틸 수 없을 만치로 빵빵해졌는지. 그것이 갑자기 뻥 하고 터져버렸나보다.


집에 돌아가는 길 지하철에서 좀 갑작스럽게 다큐 촬영 하면서 느낀 점이나 고민을 오늘의 인터뷰 참여자에게 (꽤 친해졌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 실례를 무릅쓰고) 막 털어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뻥 하고 터져버린 것인지. 이건 사실 다큐 촬영에 국한된 일이라기보다는, 내 삶 전체에 대한 회의적인 감각으로 확장되는 영역의 이슈다. 다큐에 담고자 하는 게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꽤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고, 그걸 남에게 잘 강요하는 것 같다. 툭 까놓고 말해서, 나에겐 그 잣대만큼 느슨하고 허술한 것도 없는데. 그런 검열은 언제나 있는 존재를 부정한다. 사실 그건 아무리 내가 상처에 익숙하고 그것이 아물게 하는 데도 능숙한 흉터 투성이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조차 힘들게 할 만큼 힘든 사건 들이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생각은 아니다. 그냥 백명 중 구십구명이, 혹은 천명 중 구백구십구명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다. 마이너리티 가치관을 주제로 다큐를 찍는 나의 사명은, 어떤 주장이 구십구명의, 혹은 구백구십구명이 가지고 있는 아주 지극히 보편적인 생각일지라도 절대 화면에 싣지 않는 것이다. 그 흔하고 당위적인 것이 편견일 수 있음을 견지하는 것이다. 보편의 목소리에게 마이크를 쥐어주지 않는 것이다.


17살 때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 때, 총 40시간 정도 분량을 녹화했다. 개중엔 인터뷰뿐 아니라 사물을 찍은 인서트 컷도 많았지만, 몇 번의 심층 인터뷰를 하게 되면 한 명당 2시간 남짓의 시간이 주어졌다. 40시간을 찍고 그 중 오직 10분만이 완성본으로 남겨졌다는 건, 삭제된 39시간 50분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 삭제된 기나긴 시간은, 언제 어디서나, 다큐의 바깥에서도 충분히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마주하고 (나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신봉하는 통념이다(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냥 세상 사람들과 내가 불화한다는 이 극심한 감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은 삭제된 그 39시간 50분을 상상할 수 있는지. 예민한 감각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상당히 직접적인 고통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쩌다 동성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동성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내 옆에는 없었으면 좋겠어”, “나만 안 좋아한다면 괜찮아”, “나는 그건 어려울 것 같아.” 내가 17살에,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랑이라는 메세지를 담고 싶어서 우정과 사랑을 주제로 다큐를 찍었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은 말들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호기심 같지만, 이 질문을 엄청난 권력이 뒷받치고 있다. 내 사랑을 ‘아주 이상하고 이례적인 일부 사람의 일탈’로 취급하는 말들이다. 나에 대한 배제와 편견을 전제, 혹은 정당화하는 선언에나 다름 없다.


그리고 이번 다큐에서도, 나는 위 질문과 다름없이, 사랑과 연애에 어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 사랑을 채점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했다. 아마도 앞으로 훨씬 더 많이 채점 당할 것이다. 정희진은 차이와 차별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어떻게 구분하는지, 경계선을 어디에 긋는지, 이것과 저것이 뭐가 다르다고 설명하는지. 임의로 어떤 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사실은 차별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이 특별하고 예외적이라 보는 모든 입장들은 나에게 있어 어쩔 수 없이, 차별적이다. 이번에도 그때의 다큐 제작과 사실 다른 게 없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사랑만큼 정치적인 것도 없구나, 싶다.


마이너리티 다큐멘터리스트의 임무는, 그 39시간 50분을 견디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일상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는 1분1초도 듣지 않으려고 차라리 우울한 은둔을 택해버리곤 하는, 아픈 내가 고통을 직접 들이키는 격이다. 사랑하는, 혹은 사랑할 수도 있을 뻔한 사람들이 하는, 나를 힘들게 만드는 말을 듣는 것은, 말그대로, 아주 힘들다. 그들을 내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 것 같은 이야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들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나요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랑 - 신의 놀이




하지만 2시간 중 단 30초일지라도, 그 빛나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큐를 한다. 앞으로 오래 다큐를 하고싶다. 그 빛나는 순간이 너무 값지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영감을 주는 환기의 단어들과 그 낱말의 조합이 이루는 영롱한 문장 들이 좋다. 그것이 나를 자꾸만 영상으로 기록하게 한다. 표정과 미세한 눈빛, 말투의 힘과 떨림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을 모조리 사랑한다. 사랑해서 어쩔 수 없다. 하는 수밖에는.


내가 받는 미움은 날 미워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악하거나 나빠서 생긴 것이 절대 아니다. 그건, 사회적 미움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다들 행복하자고 노력하는 것뿐이니까. 그저 모난 것이 돌 맞는 원리다. 그래서 난 누구든 모나도 ‘정말’ 괜찮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정말 흔한 표현이지만, 나처럼 모난 사람도 둥글게 깎이고 다듬어지도록 강요 받지 않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때는 수많은 ‘나’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아픈 건 정말 힘들다. 건강이 최고다.


나자신조차 마음이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괜찮다며 웃고만 있는 숱한 내 억지 표정들이 스쳐지나간다. 내 마음을 내가 몰라주면 누가 알아주지. 미움 받을 구석이 너무 많은 사람이라서, 미움 좀 덜 받으려고 하염없이 웃기라도 한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옛날 속담이, 내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을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아주 이상하게 가르친 걸지도.


‘난 항상 웃고 있을 테니까, 제발 나를 덜 미워해줘.’ 마냥 웃고 있는 나의 미소에 가려진 저편을 볼 수 있는 사람, 내 숨은 흉터 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능숙함 뒤에 그 사람의 노력이 있다”는 걸, 그걸 알아챈 사람이 바로 너였다.


내가 네 편지를 아주 닳을 때까지 펼쳐들어 읽는다는 걸, 너는 알까. 아플 때 뭐든 읽으면 좀 낫다는 나에게, 네가 그간 선물해준 수많은 읽을거리는 정말 귀중하다. 예상독자에 적중하는 글쓰기를 할 줄 아는 드문 능력을 가진, 유려하고 유능한, 존경스러운 사람.


그러고보면 그만큼 나를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그리고 깊게, 좋아해준 사람은 흔하지 않다. 딱 두 사람 본 것 같다.


난 그 사람(들)을 정말 많이 사랑했다. 그들은 내가 지금 하려는 다큐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바로 그 근본에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 중 두 사람일 것이다. 한 사람은 연인이었고, 한 사람은 (진심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둘의 공통점은 아주 도전적이어서 용감한, 20대 초반의 폴리아모리스트 여성이었다는 것.


모든 합의점을 두 사람이 직접 만들어가는 유동적인 관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또 하나의 새 방식을 나에게 가르쳐주었지. 너희들의 언어와 몸짓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의 나의 편협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이번 다큐는 꼭 너희들에게 바치고 싶어.




한땐 어쩌면 제일 즐거웠던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아니 먼 하루에

그 기억을 둘 중에 하나만 갖고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저 웃으며 인사하겠지만

사실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단다


그때의 빛나던 머리카락들과

빛나던 이빨들과

그때의 빛나던 단어들과

그때의 기억나던 손짓들과

그때를 비추던 거울들과

그때와 똑같은 습관


이랑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긴 하루의 끝으로

밤이 내려앉은 그 길로

깊고 긴 터널로

그 너머의 낮을 그리며

자정이 되기 전에

불빛이 죽어가기 전

더 높은 길로 끌어줄래

우린 거기서도 함께할 거야

가만히 있어도 흘러갔던

지난날의 뽀얀 웃음들


짙은 공기 아래

나란히 누운 우리들

얕은 마음 한켠

가만히 흐르게 두고

홀로가 될 때에는

오늘 밤만을 기억해


문없는집 - 터널




혼자 저물어가는 하루도 이렇게나 잘 흘러가

알맞은 말을 찾지 못한 지는 꽤 오래됐어

이대로 잠들지 않을 수 있을까


저무는 날은 낙엽처럼 뒹굴고

오래된 말은 지우개 가루 되어

향길 맡지 못하는 코끝을

간지럽히다가도 흩어지고

느리고 무거운 내 시간은

꽤 많은 맛을 가졌던 것 같아

지금 이곳에 지난날이 녹아든다면


어제와 오늘 내일은 없지

우린 항상 지금을 함께하고 있잖아

서로를 생각하던 나날들 그 짧았던 순간들

나의 입안에 퍼지던 달콤한 그 맛


문없는집 - 저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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