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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향기를 훔칠 순 없어도 취향은 훔쳤네

1

내 취향을 일깨워 주어서 고마워.


사실은, 하나도 안 고마워.





2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 입을 법한- 야상을 샀어. 네가 사랑했다던 그 사람은 인스타그램의 네모난 사진 속에서, 귀에는 은빛 링 귀걸이를, 목에는 검은 헤드셋을 달고 있더라. 어쩌는 수도 없이, 모조리 사들였어.


너에게도 '이루어지지 않은', '거절 당한', '받아들여지지 못한', '가닿지 않는' 따위의 수사가 어울리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만이 오로지, 나에겐 은근한 위로를 준다. 참 못 됐다, 그렇지. 너의-실패를 나 스스로 반복한 거라고 생각할 때만, 모든 게 좀 낫다.





3

난 이제 네가 하고 다니던 것처럼, 검은 바지의 끝소매를 검은 양말로 높이 감싸고, 그 위에 발목까지 오는 검은 부츠를 신어.


미용실에 잘 가지 않던 내가 머리에도 힘을 줬어. 아주아주-재밌는-파마를 했지.


나도 너처럼, 바람이 쌩 부는 날, 후드티를 입고 싶어서,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바람 부는 날에 네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비싼 후드티를 무리해서 샀어. 바람이 쌩, 부는 날에 꼭 입을게. 이 날씨가 나에게 이 옷을 입혔다는 점을 알아챌 사람은 내 세상에 없겠지만. 바람이 쌩, 부는 날에 입을게.





4

처음엔 너무너무 요상하고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예지의 노래를 이제 많이 좋아해.


사실 너에게 그때 그날 그 방에서 난 거짓말을 했다. 그 노래 참 좋더라, 말했던 건 거짓말이었다. 네 취향에 공감해주면 네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 믿고 난 거짓말을 했다.


너는 거짓말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지- 그때 나에게 어떤 곡이 제일 좋냐고 물어왔었다. 내가 일러줬더니, "돈으로 살 수 없어", 리듬을 타며 노래 했었다. 어설픈 창법이 재밌었다.


거짓말을 치르고 빌린, 그 순간엔, 거짓이 없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꼭 너랑 같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내가 말했던 것이 기억나니. 가성비 데이트네, 하고 네가 농담했던 게 나는 문득 떠오른다. 지금도, 이걸 듣는 게 나에겐 데이트인 걸까. 너의 생각이 궁금하다.


네가 내 주머니 속 지도에서 죽었다.


처음엔 노래만 들어도 곡에 네가 많이 묻어있어서 괴로웠다. 그런데 있잖아, 이제는 잘만 듣는다. 그렇다, 참. 그렇더라. 어느새 즐기고 있더라.


언제부터 즐길 수 있었나 생각해보면, 너와 잔을 기울였던 게 마지막이었던, 내 술이란 것의 역사에 더해, 그 이후로 처음, 진탕 취해서는 홀로 비틀거리면서 예지의 노래를 지하철에서 최대 볼륨으로 들었을 때부터였다. 그렇다, 참, 그렇더라. 어느새, 어쩌는 수도 없이 그 앨범을 난 모조리 즐겼어.


그리고 말이지, 나도 이제 그때 그 펍에 가면은, 예지의 노래가 나오면, 나 이 노래 좋아한다고 옆사람에게 꼭 말을 한다.





5

그리고 말이지, 그때 그 펍에 가면은, 음료를 주문해야 할 때, 꼭 뭔가 나에게 중대한 선택의 기회가 온 것처럼 들뜨고 기쁘다. 계란이 안 들어갔는데 계란맛나는, 노 에그노그를 주문한다. 뜨거운 걸로 마신다. 내가 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게 괜스레 안심이 된다.


하지만, 보니밤은 다시는 안 먹을 것 같다. 편의점에 파는 가공식품 군밤 맛나는 밤이랑 다를 게 없을 뿐인데, 참, 그렇다. 외국 애들은 크리스마스 날에 꼭 이 요리를 해먹는다, 하고 네가 말해준 후부터, 그 밤 요리를 안주로 먹기는 지독하게 싫어졌다.


보니밤이 노 에그노그랑 다를 게 뭘까. 나는 너처럼 외국에서 크리스마스 날에 보니밤을 먹는 일은, 앞으로도 못 할 것 같아서 그렇나봐. 닭이 괴롭게 낳은 알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꼭 그런 맛이 나는 음료를 시키면, 나는 꼭 너처럼-더 나은 사람이라고 나를 생각할 수 있나봐. 그래서 보니밤은 안 되고, 노 에그노그는 되고. 그렇나봐.


작고 묵직한 나무 포크에 꽂힌, 밤톨을 부딪쳐 건배를 나눌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6

그런데 있잖아. 네 취향을 훔칠 순 있어도, 그 향기는 훔칠 수 없더라.


네가 네덜란드에서 산 독특한 스타일의 무화과향 향수는, 오늘 연남동 향수가게에서 시향해본 스무여가지 중 무엇과도 닮지 않았더라. 향 마다의 사연을 내게 설명해주신 분이, 시향지에 뿌리고 맡을 때랑 손등에 뿌렸을 때가 향이 완전히 다르대. 사람 마다의 체취가 달라서. 그래서 난 마음에 드는 향이 없었나봐. 어쩌면 다시는 맡을 수 없는 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 향이 무화과향이라면 무화과향을 찾으면 되는 거고, 네덜란드산이라면, 네덜란드에서 구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지. 그건 그 무엇도 아닌 너의 향인 거였어, 그래, 구할 수 없는 거지. 이제 더는 내가 너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스크를 살짝 들추고, 스무여가지 향을 잔뜩 코에 부빈 탓에, 저녁녘부터 두세 시간째 현기증이 나. 그래, 잘못된 장소에서 온통, 틀린 향만 실컷 맡았다. 그렇게 해봤자, 얻을 수 없었다.





7

반쯤 성공한 기분이 들어, 사랑-한 뒤에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는 일 말이야. 향기를 훔칠 순 없어도 취향은 훔쳤네. 반쯤 성공한 기분이 들어.





8

너를 사랑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려고 해. 그래, 너에게 주었던 마음의 크기와 온도를 버리지 않고, 다만, 그 대상을 옮기려 해. 그래,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해. 훔친 취향은,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내게 스미기를.





9

취향을 알게 해준 네가 많이 미워.


사실은 되게 고마워.





10

그런데 있잖아, <피리 부는 여자들>, 언젠가 네가 직접 선물해 줄 거니까 먼저 사지 말라고 말했던 일이 생각나니. 덧붙이듯이 얼른, 응, 질문은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은 말이야, 네가 내게 아주 깊고도 무던한 말투로, 늘 그랬듯이 또 같은 문구로 대답해오는 것 같아, 그렇구나, 라고. 아주 무심하고도 무심한 말투로 대답해오는 것 같아.


참 이상해. 너의 취향은 어쩌는 수도 없이 모조리 돈으로 사재기면서, 왜 네가 가장 좋아한다는 책을 읽는 일은 두려울까. 그래, 네가 가진 생각들까지 훔치고 싶지는 않은 거지. 그 생각이라면 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종류의 생각일 것 같아서. 내 결핍과 못난 점을 온통 가리키고 있을 것만 같아서. 난 그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으려고.


하나도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사실 알고있다.


고집을 부린다.


난 그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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