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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Mar 25. 2022

좋은 사람을 알게 된 것 같다

천천히 오가는 대화 속에

남는 단어는 몇개일까요

구석진 자릴 앉아 커피를 마셔

그대의 일부 식지 않도록


신인류 - 작가미정



1. 너에게 인터넷 편지가 오지 않는 오후 12시가 있다면, 그때 한 편씩 꺼내어 읽으면 될 것 같아. 소설은 서너개보다 배는 많은 편수의 모음집이었다. 네가, 나에게 어울린다고 일러준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첫 만남에 줄 선물로까지 호의롭게 결심했지만, 나를 간파한 어느 다른 인간이 이미 내게 추천한 적이 있는, 그래서 내가 이미 책장에 꽂아둔, 책 한 권이었다.


그 전 사람에게 책 추천을 받은 지 한달쯤 지났을 때, 책을 구매했다. 구매한 지는 지금으로부터 또다시 한달은 지났지. 어제 너를 만나고, 오늘 처음 펼쳐든다. 과연, 네가 어제 내게 선물한 거나 다름없지. 그렇게 믿으면, 그런 것.


그렇게 첫 번째 소설을 힘겹게 시작한다. 몰입으로 전환되어 눈물을 두어방울 그렁거렸을 때쯤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곧바로 다음 소설이 나를 두 손 내밀어 이리오라고 잡아 당기고 있었지만, 잠시 망설이는 눈짓을 하다가 표지를 덮는다. 너에게 인터넷 편지가 오지 않는 오후 12시가 있다면, 그때 한 편씩 꺼내어 읽기로 하자. 그럼 꼭 편지가 제때 도착한 기분이 들 것 같아.


사람은 믿는 것만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믿는 것은 이 소설이고, 이 소설은 너의 인터넷 편지라고 생각할게.




2. 소설은 서너개보다 배는 많은 편수의 모음집이었다. 네가, 나에게 어울린다고 일러준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 첫 만남에 줄 선물로까지 호의롭게 결심했지만, 나를 간파한 어느 다른 인간이 이미 내게 추천한 적이 있는, 그래서 내가 이미 책장에 꽂아둔, 책 한 권이었다.


무언가에게 “어울린다”는 느낌이란, 참 감각적인 직관이다. 누군가는 절대 발견할 수 없을 두 가지 사이에 연관성의 다리를 놓는 일은 순식간에 뚝딱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내면의 많은 지적 먼지들이 쌓여서, 그 더미에 입김을 후, 하고 불면은 실체가 드러날 것만 같다. 그렇게 드러난 실체가 바로 “무엇에게 무엇이 어울린다”는 직관, 그 촉인지도.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무엇이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 건 생각보다 짜릿한 일이다. 통찰이 있는 인간이면 더 그렇다. 돈을 벌고, 모으는 인간이면 더 좋다, 이 사회에서 “통찰”이라고 불리는 것이 없으면 돈을 받을 수도, 잔고를 두둑하게 모을 수도 없으니까.




3. 친구를 사랑했다. 사랑하면 친구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랑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를 사랑했다. 사랑하면 친구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였다. 감정은 뭘까?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 감정이 안 든다, 과연, 이런 말들 속에서 감정이란 것은 결코 중립어가 아니다. 아무 것도 담지 않은 단어가 아니란 뜻이다. 감정은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없고, 감정이 없는 순간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표현은 곧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다름 없을 뿐이다.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자, 나의 그 모든 일 중에서 어쩌면 가장 많이 이루었던 “바로 그” 일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도통 쉬워지지를 않는 가장 지난하고 지독한 과정이었다.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대상(상)을 소유하고 결박하려 집착하면, 그 노력의 결실은 가히 사랑이라 불릴 자격을 거머쥔다. 결국 본질은 감정이다. 감정을 느낀다, 너를 사랑한다, 가슴이 짜릿하다, 뭐 그런 거.




4. 나는 오만하기 짝이 없어서,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단번에 내 멋대로 구분한다. 자동화된 시스템이다. 내면의 시스템은 거역 불가하다. 그렇기에, 관심 없는 남에게선 좋은 점을 잘 못 찾는다. 내 안에 몰두한다, 침몰한다, 침잠한다...


제가 뭐라고 사람을 평가하겠어요, 너는 내 걱정치레에 되받쳐, 어제 그런 엇비슷한 말을 했더랬지.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뭐라고, 나는 사람을 평가합니다.


사실 평가라기보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직감하는 것에 가깝겠지. 그러니, 오만하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5. 내 글을, 지독하게 여러번, 읽어줄 정도로 마음이 진심이라면, 감정이 있다면. 이런 혼잣말도 귀엽게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미움 받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지만, 쉽지 않은 것과 어쩔 수 없이 자주 겪는 것은 서로 무관해서, 미움 받기란 나에게도 매번 참 어려운 일이지만, 너무 익숙하다.


나를 낳아놓고는 내가 이해 받을 수 없게 굴러가는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내가 정말로 이해하고 싶은 게, 몇이나 될 것 같아?


하지만 이해 받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있다. 그것이 충족될 때 나는 감정을 느낀다. 좋은 사람을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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