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시작한다. 이 길은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져있는 길이다. 길바닥은 에스컬레이터와 같아서, 자동으로 윤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무리 뒷걸음질을 치거나 방향을 백팔십도 바꾸어 뒤로 달려보아도, 결국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의 도로다. 윤지는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도 이따금씩 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뭐라도 눈에 뵈는 것처럼 허공을 또렷하게 응시하려고 애를 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뭔가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이 진짜 존재해서 보이는 것인지, 윤지가 만들어낸 상상인지, 혹은 꿈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윤지는 잠도 안 자고 꿈도 안 꾸는 인간이다. 인간이기는 한가?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윤지라는 것이 가리키는 바이다.
윤지는 글을 읽을 줄 안다. 이 세상에는 윤지 혼자밖에 존재하지를 않는다, 아마도. 윤지는 다른 존재에 관해 글을 읽는다. 윤지가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 윤지를 운반하고 있는 이 기나긴 에스컬레이터의 저 앞에는 책이 때때로 덩그라니 놓인다. 그러면 윤지는 책이다, 하고는 그걸 주워서 펼쳐 든다. 읽어내린다. 읽는다. 읽는다. 읽는다.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그러다가 책은 갑자기 언제 있었냐는 듯이 또 없어진다. 형체를 완전히 감춰버려서 있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다. 하지만 그 말들만은 윤지에게 오랫동안 남을 때가 있다.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음지로 늪으로
난 보라색 마음을 가졌네
난 가끔 말하는 법을 잊네 *
윤지는 글을 읽는다. 그러다가 문득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에스컬레이터의 저 앞에는 이번에는 책상과 의자가 보이고, 그 위엔 연필과 종이가 놓인다. 윤지는 그때를 기다린다. 이제 터득한다. 내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 쓸 수 있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윤지는 종종 글을 쓴다.
수많은 이들 오고 가는 거리에서 보면
다들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
윤지는 가방을 모로 메고 있다. 처음에는 그렇다. 그러다가 가방에 더는 종이들을 비집어 꾸겨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그 가방이 꽉 찼을 때, 윤지가 뒤를 돌아볼 때면 그 자리엔 상자들이 놓인다. 윤지는 상자 위에 윤지의 글을 차곡히 쌓기 시작한다. 그렇게, 윤지가 뒤를 돌아볼 때면 자꾸만 상자들이 하나 둘, 생긴다.
윤지는 계속 서있다. 윤지의 체력은 무한하다. 앉거나 눕거나 눈을 감고 쉬는 행위는 결코 체력이 부족해져서 충전코자 하는 일이 아니다. 그냥,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것이다. 매순간 눈을 깜빡이는 일이 아무 의미없듯이(물론 눈을 깜빡여야 안구가 건조하지 않겠지만서도).
윤지는 생각해본다, 내가 느끼는 것이 따분함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서. 언젠가 책에서 윤지는 읽는다. 인간은 지루함, 따분함, 외로움 때문에 한 발자국씩 죽어가는 존재와도 같다고. 윤지는 생각이라는 걸 한다. 지루함과 따분함은 무엇일까. 평생에 내가 느껴온 이 감각을 일컫는 말일까. 나는 늘 이 상태여왔는데, 인간들은 이런 감정을 ‘종종’ 느끼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감각하기도 하는가보구나.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감정’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것들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도 못하겠는구나. 그럼그럼. 상상도 못하지...
윤지는 언젠가 집에 관해 읽는다. 인간에게는 집이 있다고. 그럼 이 끝없는 에스컬레이터가 나의 집인가, 윤지는 생각한다. 집은 유한한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지는 유한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끝이 있다고? 그것이 집이라고? 집은 안정감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끝이 있는 게 집이라면 내가 아는 세계와 너무나 다르는구나. 그곳에 있으면, 나도 더는 흐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게 되는 것이는구나. 정말 괜찮을까, 그것이? 윤지는 집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온다.
에스컬레이터에는 때때로 생겨나는 책과 책상과 의자, 책상 위의 펜과 종이, 뒤를 돌아보면 언제든지 있는, 어느새 무수히 많아진 늘어진 상자들만이 있다. 윤지는 이번에도 뒤로 돌아 한번 세차게 내달려본다. 셀 수 없는 크고 작은 크기의 다양한 색상의 온갖 상자들이 에스컬레이터의 모서리를 따라 윤지의 활주로 양쪽 주변에 주욱 늘어져있다. 윤지는 뒤로 걷다가, 걷다가 잠깐씩 멈추어 선다. 어떤 상자가 유독 눈에 띄면은, 멈춰서서 그 상자의 겉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만져본다. 그 안에 쌓인 종이 뭉치들을 한 데 꺼내서 찬찬히 읽는다. 아, 내가 이런 것을 썼는구나, 하면서. 그때의 시간을 느낀다. 그래봤자 이야기 속의 사람은 오직 윤지 혼자다. 잠깐 그 속에 잠겨, 심취해 있으면은 윤지는 잠시 눈을 감는다.
눈을 떴을 때, 윤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져있다. 앞으로,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에스컬레이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느 한복판. 앞에는 아무 것도 없고, 뒤로는 상자들이 주욱 늘어진 그 무구한 공간. ‘공간’이라는 말이 이 에스컬레이터에 과연 어울리는지 윤지는 다시 생각해본다. 공간은 보통 끝이 있어야 공간이던데, 여기서부터 저기 ‘끝’까지, 라는 개념이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느낌인걸.
난 기타를 메고
멈추지를 않는 기차에 올라타
목적지가 없어도
서운하지 말라는
철도원을 봤지
난 내 삶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게 참 궁금했는데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안 됐지
하나 셋 둘 넷
사실 노래라는 건 쓸모없는 것에 가깝다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일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쓸모 있는 것들로만 채워진다면
그것 또한 괴로운 일이다
여전히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곳엔 많다 ***
윤지는 이번에도 뒷걸음질 치다가 마주한 하나의 상자를 하나 고른다. 그것을 열고, 종이 뭉터기를 읽어내린다. 그때, 윤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글에는 지금에 윤지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나온다! 그것은 분명, 타인이다. 윤지가 아닌, 아닌 사람. 윤지는 자기 글을 스스로 의심한다. 내가 누구와 말을 하고 있다고? 윤지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왜냐면 말을 해도 들을 사람이 없다. 인간은 말을 한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윤지에게는 그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시간, 윤지는 시간에 관해서도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이라고 한다. 윤지는 생각한다. 이 에스컬레이터의 다른 이름이 시간인 것이는구나. 그런데 이 에스컬레이터는 공간이라며?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은 있는 에스컬레이터는 ‘공간 내부의 공간’이라고 나는 읽었는데. 이 에스컬레이터는 사실은 시간인 것인가? 아!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이 가짜면 어떡하지, 하고 윤지는 걱정 섞인 생각을 시작한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고싶은걸까
길은 있는걸까 갈수있는 힘은 있는걸까
오늘이 지나가면 내일은 어떤 표정일까
달은 지는걸까 밝아오는 내일은 있을까
이곳은 진실의 중간일지
아니면 거짓의 문턱일지
이곳은 세상의 중간일지
죽음의 문턱일지 모른채 ****
가짜, 윤지는 가짜와 진짜에 관해서도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가짜는 나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평생 진짜를 좇으면서, 찾으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윤지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에 적혀있는 말들은 참일까. 그것이 거짓이면 어떡하지. 내가 평생 아는 것이라고는 전부 이 책에 적힌 말 들뿐인데. 이것이 거짓이면 나는 이제 도대체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분별해내는 일이란, 나에게 가능한가. 내게 그런 능력이 정말 있는가. 없으면 어떡하지. 윤지는 새 종이를 마주한다.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네
그리운 사람도 없는데
너무 너무 너무 그리운데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생각을 해 봐도
나는 모르겠는데 아무도 없는데
하고 싶은 말도 없는데
너무 너무 너무 하고 싶네
듣고 싶은 말도 없는데
너무 너무 너무 듣고 싶네
이런 말일까 저런 말일까 생각을 해 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모르겠는데
한참을 생각해도 아무도 떠오르지를 않다가
문득 한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눈물이
흐르는 건 왠진 알 수가 없지만
그 사람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진
알 수가 없지만 *****
윤지는 돌연, 처음으로 말을 뱉는다.
ㅡ어떡하지.
윤지는 스스로 놀란다. 내가 말을 했어! 발음에 관해서도 책에서 읽은 바가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닌 줄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이유로 듣게 되지 않았지
너와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얘기를
그저 오랜 일기장에 빼곡히 적어두겠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끝에서
가닿지 못했던
들리지 않았던
들을 수 없었던
수많은 얘기들
지워야만 했던
지울 수 없었던 것
그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 걸 깨닫기까지 ******
윤지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되뇌듯이 입 모양을 꿈틀거려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리고 또, 어떡하지, 라고.
윤지는 괴로움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가짜와 진짜, 공간과 시간, 유한한 공간으로서의 집과 이 무구히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 뒷걸음질 치면 놓여있는 수많은 상자와 그 속의 종이들. 윤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이름과 그와 윤지가 함께 나누어 가진 시공간 속의 이야기 들. 윤지는 괴롭다. 윤지는 혼돈에 빠진다. 윤지는 머리를 스스로 쥐뜯는다.
윤지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말을 떠올린다. 인간은 지루함, 따분함, 외로움 때문에 한 발자국씩 죽어가는 존재와도 같다고. 그러나 이상한 일이지. 윤지는 지루함과 따분함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제 역설적으로 알 것만 같다. 지금 이 감각과는 분명 정반대의 것일 테지. 윤지는 매우 극성스러운 기분을 느낀다. 거짓과 진실의 기로에 놓인 듯한 혼란스런 감정을 추동하는 자극은 윤지에게 너무 거대하다. 윤지는 지금, 자신이 여지껏 놓여있었던 무의 상태를 그리워한다. 그리움, 이것이 그리움이는구나. 따분함을 그리워한다. 지루함을 그리워한다. 이 자극은 너무 강렬해요, 나를 살려주세요! 윤지는 언젠가 신에 관해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그에게는 기도를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물론, 헌금도 내야 한다고.
간밤에 걸려왔던 한 통의 전화 때문에 그런지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도 모르는 웃음이
번지는 듯해 잠깐 설렜다가도
이내 그 얼굴도 웃음도
한꺼번에 모두 사라져버려서
나는 역시 분명히
불 켜둔 채 잠깐 잠이 든 틈을 타서 사라진
그 얼굴도 웃음도 한꺼번에 모두 되돌아왔지만
나는 정말 분명히 ***
윤지는 서있는 채로, 잠깐 정신을 잃는다. 아, 방금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이 잠에 빠지는 것인가. 인간은 잠도 자고 꿈도 꾼다는데, 내가 잠을 잔 것인가. 그러다가 다시 윤지는 정신을 되찾는다.
믿을 수가 없다! 에스컬레이터 저 앞에, 아주 작게 보이던 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윤지가 엄청난 자극에 압도되어, 역설적으로 지루함과 따분함이라는 평상시의 감정을 깨달은 때다. 그 점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윤지는 그것이 자신이 단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형체의 것이란 사실을 자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윤지는 뻣뻣하게 경직된 온몸의 감각을 실감한다. 그것은 에스컬레이터가 흐르는 방향에 역행하며 거꾸로 걷고 걸어서, 결국 윤지가 있는 곳에 이른다.
ㅡ안녕?
아! 그것은 인사를 하는구나, 윤지는 언젠가 인사에 관해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그렇다면 대답을 하는 거랬어.
ㅡ’어떡하지?’ 아니, 이게 아니고. 안녕.
윤지는 처음 습득한 발화였던, 짧은, 고통과 참회의 한 마디를 실수로 내뱉었다가, 얼른 인사로 그것을 대체한다. 세상에, 그것은 미소를 띤다! 입꼬리가 양뺨의 가를 따라서, 모로 길어지고 늘어진다. 윤지는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 어색하게 그것을 흉내내어본다. 인간’들’은 서로를 만나면 상대방의 행동을 모방한다고 윤지는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서로가 다른 행동, 어긋나있는 규율을 실천해서는 안 된다고. 상대방이 하는 것을 윤지도 따라해야 한다고, 읽은 대로 윤지는 책을 따른다. 타인은 윤지에게 또다시 말을 뗀다.
ㅡ내 이름은 경은이야. 네 이름은?
윤지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윤지는 자기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책에서 이름에 관해 읽은 바가 있다. 윤지는 자기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일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 개체로서의 타인의 존재가 필요없어온 윤지에게, 이름은 사실 쓸모도 없어왔다. 윤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느릿하게 말을 뱉는다.
ㅡ네가 내 이름을 지어줘. 나도 이름을 갖고 싶어.
경은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며 두 눈으로 똑바로 윤지를 응시한다.
ㅡ그럼 너를 내 ‘친구’라고 부를게. 네 이름은 ‘친구’야.
윤지는 잠깐 생각한다. 친구라고? 그건 내 이름이 아니잖아. 그건 가짜야! 나쁜 것이다! 나는 새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이지, 그건 가짜야... 이름이 아니잖아.
ㅡ하지만 그런 것은 결코 이름이 아니잖아. 내가 알기로는 말이야, 그건 네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아주 추상적인 낱말에 불과한걸.
경은은 윤지의 똑부러지는 말들을 듣고 살짝 비웃는다.
ㅡ네 이름? 네 이름이 꼭 필요하니? 넌 이름이 없다며. 나는 그래서 네가 부럽는구나. 내가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면, 이제부턴 그게 네 이름이 아니고?
ㅡ그건 거짓말이야. 나에게는 이름이 필요해. 왜냐면 너도 아까 너를 ‘경은’이라고 소개했는걸. 왜 나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 거지? 왜 나를 ‘친구’라는 보통의 명사라는 울타리에 가두어버리는 거지? 너는 내가 이름을 갖는 일을 질투하니? 너는 내 존재를 질투하는구나!
그것은 거의 광기이다. 윤지는 이름을 주지 않는 경은에게 어느새 화가 난다. 그러나, 잠시 고민한다. 내가 여기서 화를 내면, 인간은 떠나간다고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윤지는 침착하려고 애를 쓴다. 에스컬레이터는 흐르고 있다.
ㅡ네 말이 맞아. 나는 너를 질투해. 너는 앞으로 이 에스컬레이터의 어느 구역에서든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날 테지. 하지만 내가 네게 이름을 붙여준다면, 그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쓰게 되잖아. 내가 만약 너를 ‘윤지’라는 새 이름으로 부른다면, 나는 이제부터 한평생, 너를 윤지라고 부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언제고 생각하며 질투하게 될 것이잖아. 나의 윤지, 나의 윤지... 나의 윤지여야만 하는데, 나의 윤지가 아닌, 다른 윤지.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한다는 걸 너는 아니?
윤지는 ‘윤지’라는 이름에 관해 잠시 생각한다. ‘친구’보다는 아무래도 낫잖아. 하지만 경은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는다.
ㅡ너에게 친구가 아닌, 다른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굳이 내가 하고 싶지 않은걸. 네 이름을 갖고 싶다면, 그런 것은 네가 직접하도록 해. 넌 네가 처음 만난 인간이 나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네가 만난 사람들은 모조리 잊은 거니? 너는 네 상자에 들어있는 종이에 적힌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기억하지 못하니? 사실 너에게 이름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없다고! 없다고! 없다고! 그리고 또, 없다고! 그들은 너에게 매번 새 이름을 주겠지만, 그건 다 가짜라는 걸 네가 알게 되면, 그때의 너는 외로움에 미쳐버리겠지.
경은은 외마디 비명처럼 말했다.
ㅡ네 이름은 윤지야.
윤지는 경은의 두 손을 제 것으로 한 짝씩 붙잡는다. 윤지는 언젠가 사랑에 관해 책에서 읽은 바가 있다. (完)
본문에 책갈피 표시된 가사들의 원곡 출처
*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 제목 미정
** 시와 - 두리번거리다
*** 김제형 - 노래의 의미
**** 헨 - away
*****임금비 -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 김제형 - 실패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