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트 Mar 25. 2022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p에게

p에게.


안녕, p. 이렇게 너를 부르면은, 너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 위의 뭔가에 열중해있다가도, 곧장 목을 치켜들고 내 쪽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p, 오직 그 한마디에, 온갖 궁금증을 다 담아물고선 순간적으로 동그래진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p, 오직 그 한마디에.


너는 엷은 선을 여러번 슥슥 그어서는 참 많은 것을 그리곤 했다. 나를 그려준 적도 있었지. 그림은 네가 나를 피사체로 찍은 사진 과제물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고, 그림 속 나는, 그 사진 속 나는, 두 눈을 살포시 내리깔고 감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 내가 결정적인 순간에 두 눈을 그저 질끈 감아버렸던 그 많은 순간에, 우아하게 살포시 감은 척했지만 너무나도 질끈이어버려, 너에게 상처를 입혔을지. 그래서 지금은 어때?


너는 엷은 선을 여러번 슥슥 그어서는 참 많은 것을 그렸다. 내가 노래를 들려주면은 너는 그것이 너무 좋다며, 다시 그 눈과 입 들이 동그래져서는 종이 위에 연필을 잡았다. 네가 긋는 선들이 온통 나였다. 네가 긋는 선들은 펜촉 끝에서 가느다란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게 휘었다가는, 저렇게 뻗으면서.


한번은 네가 내 친구의 침대 위에서 엉엉 울었던 일이 생각난다. 내 맞은 편에 주저 앉아서 고개를 제 품에 파묻고 눈물을 소리 없이 자꾸만 떨구던 너를 잊지 못한다. 사람들이 자꾸만 너를 아프게 할 때면, 내가 있어서 사는 게 조금은 덜 외로웠는지. 세상이 너를 무너지게 할 때면은 나는 꼭 네 손을 붙잡고, 가는 홑겹의 네 등을 토닥이면서, 네 곁에 있겠다고 다짐했었다. 네가 있어야, 그럴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있어야, 그럴 수 있다는 걸.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너랑 나란히 앉아 몇시간이고 길을 떠나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제발 들어달라고 이어폰을 건네면은, 너는 꼭 좋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주었다. 네가 들어주면은 그 노래는 꼭 내가 너한테 불러주는 곡이 되었다. 너랑 있으면, 음치인 나도 노래를 얼마든지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손을 잡아도 되는지 몇번인가 물어보곤 했었다. 그랬겠지. 그 가느다란 생명을 사랑했으니까.

이전 13화 공간에는 시간이 새겨지나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