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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레테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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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Aug 27. 2024

레테(4)

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무대 밝아지면 길에 서있는 도은

거센 비바람에 머리칼이 날리고

몸이 흠뻑 젖는다. 

가방잃어버린여자, 도은을 살핀다. 도은에게 다가간다.    

  

가방잃어버린여자 가방 없어요?

도은 (미친 사람을 본 듯 화들짝 놀라며) 네?

가방잃어버린여자 먼 길 가면서 왜 가방이 없어요? 혹시 당신도 가방 잃어버렸어요?

도은 웬 가방? 

가방잃어버린여자 아니. 꼭 가방이 아니라도. 뭐든.

도은 …….

가방잃어버린여자 몰라요? 

도은 뭘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사람들은 보통 집에만 있는데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잖아요. 몰라요? 

도은 자꾸 뭘 모르냐고 묻는 거예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모르는 것 같아서요. 

도은 참 나.      


사이     


도은 그리고 말이 돼요? 밖으로 나오는 이유가? 고작 그거라고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엄청난 이유인데?

도은 잃어버린 걸 찾으러 나온다는 게 엄청난 이유예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물론이죠. 

도은 이해가 안 가요. 가방은 외출할 때 쓰는 건데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건 한때는 그걸 들고 외출을 했었다는 거잖아요.

가방잃어버린여자 그렇죠. 

도은 그러니까 외출을 하는 이유가 가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죠.

가방잃어버린여자 그렇죠. 

도은 정리됐죠? 

가방잃어버린여자 저기요. 

도은 왜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잘났구요. 근데 그거 알아요? 가방을 잃어버린 날 내가 무슨 이유로 외출했는지 기억이 안 나거든요. 그 후론 가방을 찾기 위해 외출했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당신은 이런 감정 몰라요?

도은 몰라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이런 감정에 논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구요. 세상이 논리로 설명되지는 않으니까. 

도은 알았어요. 알았고요. 자꾸 저한테 뭐 잃어버렸냐고 묻지 말아요. 그럼 저도 논리 따위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      


사이     


가방잃어버린여자 오해는 말아요. 난. 그냥 당신이 가방 잃어버렸으면 나랑 같이 찾아보자고 한 얘기예요. 

도은 가방에 뭐 귀중품이라도 들었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아뇨. 가방이 비싼 거예요. 

도은 요즘 비싼 가방 잃어버린 사람이 많나 보네. 

가방잃어버린여자 무슨 말이에요?

도은 설마 루이비통? 막 이런 거?

가방잃어버린여자 네! 어떻게 알아요?

도은 어! 혹시! 

가방잃어버린여자 혹시? 그 가방 봤어요?

도은 들었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들었다구요? 제 가방을? 

도은 아뇨. 그 가방에 대해 들었다고요. 남편한테. 

가방잃어버린여자 남편이 가방 봤대요?

도은 남편이 역무원인데 지하철역 분실물로 들어왔었대요. (손으로 묘사하며) 작고 이렇게 줄이 긴 가방이라고 했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맞아요! 제 것도 그런 거예요. 

도은 근데 그거 주인이 찾아갔다는데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난 찾아간 적 없는데요?

도은 언제 잃어버렸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일주일 전에. 

도은 맞아요. 딱 일주일 전.

가방잃어버린여자 어디 역이에요? 

도은 2호선요. 강남역.

가방잃어버린여자 난 거길 간 적이 없는데?

도은 잃어버렸다고 전화 걸지 않았어요? 맨발로 다니는 남자? 쿠킹 호일?

가방잃어버린여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네? 

도은 아. 아니군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어떻게 확신해요?

도은 아주 단순하죠. 정황의 문제니까. 

가방잃어버린여자 루이비통 가방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도은 루이비통 가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숫자만큼 가능성은 있죠. 

가방잃어버린여자 비관론자?

도은 딱히 아닌데. 비관론자는 당신 아닌가? 

가방잃어버린여자 내가?

도은 그렇잖아요.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죽을상을 짓고 서 있잖아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잃어버리는 게 좋아요 그럼?

도은 잃어버렸으니까 비로소 소중한 건 줄 알았잖아요. 

가방잃어버린여자 와 말장난 잘하신다. 

도은 가방에 뭐 특별한 것도 들지 않았다면서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무심코) 네. (사이) 네? 아뇨. 특별한 것들이에요. 

도은 거봐요. 잃어버리니까 그제서야 안에 든 것들도 특별한 게 된 것 같죠? 사실은 가방 가격이 신경 쓰였으면서. 뭐가 들었는지 기억은 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립밤이랑. 텀블러. 그리고…… 영수증 몇 장. 

도은 겨우? 

가방잃어버린여자 그 사람이 준 조개. 

도은 조개?

가방잃어버린여자 놀이터에서 주운 조개요. 

도은 놀이터에서 웬 조개? 

가방잃어버린여자 (화내며) 놀이터에 조개 있거든요. 

도은 알겠구요. 있다 칩시다. 

가방잃어버린여자 그날 밤 가로등 밑에서 그 사람이랑 같이 그네를 탔어요. 

도은 놀이터에서? 어른들이?

가방잃어버린여자 어른들도 그네 타거든요? 

도은 아. 네네. 탄다 칩시다. 

가방잃어버린여자 그네를 타면서 이야기 나눴죠. 그리고 그 사람이 조개를 주워서 줬어요. 난 그것을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어요. 그 후로 가방에서 물건을 꺼낼 때마다 모래가 떨어졌는데 일 년이 넘었는데도 계속 나오더라구요. 모래가.

도은 그 사람은 남자친구?

가방잃어버린여자 남자친구? 가 될 뻔했던 사람. 

도은 아…… 남자친구 될 뻔했던 사람? 아주 복잡한 관계네요. 지금은 끝난 사이? 

가방잃어버린여자 아뇨. 그 모래알들이 가방에서 다 사라질 때쯤 끝나겠죠. 

도은 가방을 뒤집어서 탈탈 털어 냈어야죠. 

가방잃어버린여자 난 그저 시간을 갖고 싶었다구요. 모래알만큼. 

도은 그럼 가방을 찾지 말고 차라리 그 사람하고 다시 만나요.     


사이     


가방잃어버린여자 떠났어요. 

도은 어디로? 

가방잃어버린여자 당신이 가려는 곳. 

도은 어떻게 알았어요?

가방잃어버린여자 그냥 알아요. 그곳에 가면 다만 선 하나가 그어져 있을 뿐인데 그 선을 넘으면 모든 기억을 잃는다죠?

도은 그렇대요?

가방잃어버린여자 그 사람은 눈 딱 감고 넘어버리면 쉽겠죠. 근데 난? 난 어쩌라는 거야. 생각해 보면 그 사람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구. 지금 당신 같은 눈빛이었어요.

도은 어떤 눈빛인데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게 뭔지 모르는 그런 눈빛. 잃어버린 게 있으면서 잃어버렸다고 말하지 않는 똥고집 눈빛. 

도은 유감이네요. 가방 꼭 찾으시길. 

가방잃어버린여자 가게요?

도은 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가방잃어버린여자 저기요. 당신은 뭘 잃어버렸어요?      


도은, 몇 발짝 걷다가 뒤돌아서     


도은 억지로 위로하려 하지 말아요. 짠해서 그래요.      


도은, 걷다가     


도은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겠군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뭐가요?

도은 그날 남편하고 대화를 끝내지 않았거든요. 

가방잃어버린여자 네?

도은 찾아갔다고는 말 안 했으니까. (무언가를 얘기하려다가) 아녜요. 당신이 진짜 가방 주인일 수도 있다구요.

가방잃어버린여자 가능성이 너무 희박한데요. 난 강남역을 간 적도 없는데. 

도은 언제는 나한테 비관론자냐더니. 희박한 가능성에 배팅 한번 해봐요. 

가방잃어버린여자 가 볼게요. 혹시 모르니까. 

도은 네…….

가방잃어버린여자 가능성이라는 건 있는 거니까. 당신도 다시 생각해 봐요. 잃어버린 거…… 혹시 알아요. 찾을 수 있을지. 

도은 그건 못 찾는 거예요.      


둘, 서로 잠시 바라보고 서 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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