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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레테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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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Aug 27. 2024

레테(5)

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폭우 쏟아지는 소리

무대 밝아지면 한편에 여인숙 불 들어온다.

유리문은 깨져 있고, 간판은 비뚤어져 있다. 

도은, 내부로 들어가서 머뭇거린다.      


노인 자고 가게?

도은 네. 

노인 버스가 내려 주지? 태풍 때문에 강이 불어난다면서?

도은 네. 

노인 원래 그래. 

도은 네?

노인 강 불어나도 안 넘쳐. 댐 때문에. 

도은 근데 기사 아저씨는 왜 내려 주신 거예요?

노인 하루만 더 생각해 보라고. 

도은 하루만?

노인 국가 방침이야. 

도은 말도 안 돼. 

노인 이혼할 때도 삼 개월인가 생각해 보라고 하잖아 왜. 

도은 네. 

노인 마찬가지야. 

도은 그래도 개인의 선택을 이렇게 막아서면 안 되죠. 

노인 막긴 뭘 막아. 하루만 연장하는 건데. 생각해 보고 내일까지도 가야겠다 싶으면 가면 되는 거야. 

도은 와 넘하네.

노인 빨리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도은 가족이요. 

노인 (혀를 찬다.) 어쩌다가. 

도은 그렇게 되었어요. 

노인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도은 방 있어요?

노인 딱 한 개 남았어. 

도은 방 주세요. 

노인 (방 열쇠를 주려다가) 좀 비싸. 

도은 얼만데요?

노인 나랑 밥 먹어. 

도은 네?

노인 그럼 공짜. 

도은 저 배 안 고파요. 

노인 난 고파. 

도은 저는 안 고프다니까요. 

노인 배고프다고 했잖아. 

도은 제가요? 언제요?

노인 방금. 

도은 그런 말 안 했어요. 

노인 강이 불어났다고 하지?

도은 네?

노인 좀 비싸. 

도은 돈 드릴게요. 

노인 밥 차려 줘. 

도은 할머니. 

노인 왜?

도은 왜 그래요. 

노인 도은아. 

도은 어? 내 이름 어떻게 알아요?

노인 내 손녀 이름인데? 

도은 왜 장난쳐요 자꾸? 

노인 (갑자기 다시 정신이 들어오며 열쇠를 준다.) 이층 계단 올라가자마자 왼쪽으로 두 번째 방 201호실. 

도은 얼마예요?

노인 공짜.

도은 밥 먹어야 한다면서요. 

노인 내가 그랬어?

도은 네. 같이 밥 먹어야 공짜라고. 

노인 밥 먹으면 좋지. 근데 밥을 안 먹어도 공짜야. 

도은 왜요?

노인 원래 공짜야. 이거 나라에서 운영하는 거야. 공영여인숙

도은 장난쳐요?      


노인, 뒤돌아 싱크대에서 쌀을 씻는다.

도은, 계단 올라가려다가 뒤돈다.      


도은 밥 먹어요. 

노인 (기뻐하며) 그럴까?

도은 네. 

노인 된장찌개도 끓이고 쌀도 안치고.

도은 (팔을 걷어붙인다.) 제가 뭐 하면 돼요?

노인 이거. 쌀부터 씻어야지?

도은 네네. 쌀 박박 씻을게요.      


두 사람, 함께 요리를 한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      


노인 내 나이가 몇 같아?

도은 70? 80?

노인 90이라면 믿을래?

도은 이렇게 젊어 보이는데?

노인 90이야. 

도은 세상에. 

노인 그래서 그래. 

도은 뭐가요?

노인 자꾸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나이는 이길 수가 없더라고. 

도은 아……. 알고 계셨어요?

노인 알지. 내가 또 이상한 말 했어?

도은 아니. 자꾸 했던 말을 잊어버리니까. 

노인 항상 그런 건 아냐. 또 그럴 수도 있어. 그러려니 해. 

도은 네. 

노인 사는 것이 저주일 때가 있어. 

도은 설마. 

노인 설마라니? 자네도 잘 알아서 레테로 가려는 것 아냐?

도은 그건…… 맞아요. 

노인 그러니까 내 말을 이해하겠네. 나랑 자네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그냥 엉덩이 무겁게 버티고 있는 거야. 인생 참 재밌어. 

도은 뭐가요?

노인 90 먹은 나보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더 못 버티니까. 

도은 그게 뭐가 재밌어요? 슬프지. 

노인 본인이 선택하는 건데 뭐가 슬퍼? 그냥 재밌어. 그리고 내가 이기는 게임 같아. 

도은 인생이 게임인가. 

노인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남아 있질 않아. 

도은 가족도요?

노인 손녀 하나 남았는데. 날 보러 안 와.

도은 …….

노인 가는 사람은 마음 편해. 남은 사람이 문제지. 

도은 근데 왜 계속 버티고 계세요?

노인 응?

도은 저랑 같이 가요. 

노인 그럴까?

도은 네. 

노인 (잠시 생각하다) 아냐. 싫어. 

도은 왜요?

노인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버틴 게 아깝잖아.

도은 쓸데없는 고집. 그냥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노인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 못 해. 

도은 뭘요?

노인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지? 

도은 그렇지 않아요. 

노인 내 볼 땐 그래. 우리 땐 배곯고 춥던 시절이야. 등 따시고 배부르니까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도 하는 거야. 

도은 참 내. 저희 세대도 얼마나 빡세게 살았는지 아세요? 입시지옥 다 겪고 취업난 다 겪고 집값은 또 얼마나 비싼지 모르시죠?

노인 난 전쟁도 겪었어. 죽고 사는 문제였어. 그래도 우리 땐 말이야. 참는 것을 배웠어.

도은 뭘 참아야 하는데요?

노인 참아야 하는 걸 참는 거지. 

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건 못 배웠네요.

노인 그래. 그럼 가야지 

도은 사람 참 찝찝하게 만드시네요. 

노인 말리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 자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근데 아쉬운 거 아니지?

도은 뭐가요?

노인 내가 안 말려 줘서. 

도은 전혀요. 

노인 언제 가?

도은 내일요. 

노인 같이 놀러 갈까?

도은 네?

노인 내일 간다며. 

도은 네. 

노인 어디로 놀러 갈지 생각해 봐. 

도은 무슨 말이에요?

노인 같이 놀러 가기로 약속했잖아. 

도은 난 그런 적 없는데. 

노인 할머니랑 같이 놀러 간다고 약속했잖아. 

도은 또 시작이야? 

노인 오랜만에 와 놓고 이러기야? 

도은 (일어난다.) 갈게요.

노인 할머니는 운전 못 하잖아. 니가 해 줘야지. 

도은 산수유꽃 보러 갈까 할머니?

노인 산수유꽃 좋아. 그거 차로 마셔도 맛나. 

도은 사실 할머니 나. 고백할 게 있어. 

노인 (도은을 노려보며) 고백은 이제 그만해. 너 임신했다고 고백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떨어져. 

도은 그런 거 아냐. 할머니. 

노인 뭔데 그럼?

도은 나. 산수유차 한 번도 안 마셔 봤어. 

노인 그래? 

도은 가자. 할머니. 

노인 (신나서 일어난다.) 분홍 원피스 입고 갈까? (이층으로 올라가려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오며 뒤돈다.) 내가 또 정신이 나갔었어?

도은 (실망하며) 괜찮아요. 나는. 우리 할머니 생각나서 좋았어요. 

노인 201호야. 미안해. 진짜 공짜야. 

도은 언제 꼭 산수유꽃 보러 가요. 

노인 떠날 거면서. 

도은 …….

노인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어. 

도은 …….     


도은, 2층으로 올라간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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