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무대 밝아지면
작고 허름한 방. 도은, 짐을 풀지 않고 창밖을 본다.
창문 밖으로 비명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가 들린다.
노크 소리
도은 누구세요?
소운(목소리) 저예요.
도은 응?
소운(목소리) 저 기억 안 나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잖아요.
도은 소운이?
소운(목소리) 네. 문 열어 주세요.
도은, 문을 열자, 소운, 들어온다.
도은 너…… 다 나았니?
소운 아뇨.
도은 많이 아파?
소운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아줌마. 여긴 제 방이에요.
도은 201호 맞아?
소운 네.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옷가지를 가리키며) 저것 보세요. 제 짐이 저기 있잖아요. 아줌마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여길 왜 온 거예요?
도은 나야말로 원래 여기 오기로 되어 있었어. 넌 1번 버스, 난 2번 버스를 탔지. 기억나?
소운 네.
도은 근데 왜 니가 여길 와 있는 거야.
소운 저도 몰라요. 근데 전 여기 좋아요.
도은 넌 어려. 할 것도 많고.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가 기다리잖아.
소운 할머니는 어차피 나 보내려고 했어요.
도은 할머니가 왜 그러는지 몰라? 너 철들었다며.
소운 철드는 게 잘못이에요? 늘 다 이해해야 하구.
도은 (왠지 미안해진다.) 아냐. 그런 거.
사이
도은 돌아갈 수 있어. 의지라는 거 생각보다 무서운 거야. 조금만 더 힘을 내봐.
소운 싫은데요.
도은 왜 싫어?
소운 눈을 뜨면 또 나 혼자니까.
도은 그렇지 않아. 널 도와주는 사람도 많아.
소운 어른들은 늘 그렇게 말해요. 정작 자기들은 도와주지 않으면서.
도은 다 그렇지 않아.
소운 그럼 아줌마가 도와줘요.
도은 내가 어떻게.
소운 내가 딸 같죠?
도은 어떻게 알았어?
소운 돌아가서 날 키워 주면 되잖아요.
도은 그건 안 돼.
소운 왜? 왜 안 돼요?
도은 내 딸이 레테에 있으니까.
소운 …….
도은 미안해.
침묵
도은 있지. 사실 잘 모르겠어.
소운 뭘요?
도은 (창밖을 보며) 레테로 가면 그 앨 볼 수 있을지.
소운 왜요?
도은 거기로 간 사람들이 아무도 소식을 전해 주지 않잖아. 그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있는지.
소운 혹시 무서운 곳이에요?
도은 모르지. 정말 무서운 곳일지도. 근데 나 지금 정말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소운 뭔데요?
도은 그곳이 내 기억을 모두 가져간다면 딸을 만나도 딸인지 모를 거 아냐. 차라리 지금처럼 사는 게 나을지도 몰라. 최소한 기억이라도 있으니까.
사이
소운 아줌마. 혹시 거긴 컴컴해요?
도은 모르지. 선 하나를 넘어간다고 빛이 모두 사라질까?
소운 나 컴컴한 거 싫어요.
도은 그래. 컴컴한 건 나도 싫어.
소운 기억 안 나는 것도 싫어요.
도은 …….
소운 아줌마가 다시 돌아가면 나도 갈게요.
도은 안 돼. 난 너무 늦었어.
소운 왜요?
도은 결심한지 오래됐으니까.
소운 왜요?
도은 안 행복해서?
소운 혹시 조금이라도 행복하면 안 갈 거예요?
도은 응. 조금이라도 행복하면.
소운 조금만 행복하면 되잖아요.
도은 어떻게?
소운 맛있는 거 먹으면 되잖아요. 국수 먹으면 되는데.
도은 그게 행복해?
소운 면이 끊어지지 않을 때.
도은 면치기?
소운 네! 나 그거 진짜 잘해요.
도은 소운아.
소운 응?
도은 머리 땋아 줄까?
소운 네. 토끼머리처럼.
도은 좋아. 토끼머리처럼 해 줄게.
소운 아줌마 이 방에서 같이 자요.
도은 그러자.
도은, 소운의 머리를 땋는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도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소운이 없다.
도은 소운아. 소운아. (창밖을 본다.)
노인이 들어온다.
도은 할머니. 꼬마 애 어딨어요?
노인 응?
도은 저랑 같이 이 방에 있던 소운이요. 혹시 어딨어요?
노인 그런 애가 있었어?
도은 이 방에 원래 머물던 아이.
노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은 할머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여기 여자애 있었잖아요.
노인 (웃으며) 장난이야. 장난. 요즘은 여유가 생겨서 정신 안 나갔을 때 정신 나간 것처럼 장난도 친다니까. 그 애 갔어.
도은 갔어요?
노인 아침 일찍 갔어.
도은 말도 안 돼.
노인 내가 그냥 이 방을 줬겠어? 한 명이 가니까 다른 한 명한테 준 거야.
도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노인 각자의 시간이 있는 거야.
도은 시간이라뇨. 이건 선택의 문제잖아요.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노인 (고개를 젓는다.) 아닌 거 자네도 잘 알고 왔으면서 그래.
도은 됐고요. (재킷을 걸친다.) 어디로 갔어요? 소운이?
노인 이미 늦었어.
도은 안 늦었을지도 몰라요. 따라가 볼래요.
노인 버스 떠났어.
도은 어느 방향이에요?
노인 어디긴 어디야. 저기 저 강 너머지.
도은, 급히 챙겨서 나간다.
노인 산수유꽃 보러 간다며.
도은(목소리) 미안. 나 못 봐요.
노인, 혼자 남는다.
노인 (강 너머를 바라보며) 바로 저기구나. 거의 다 왔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