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2번 버스 안
도은이 앉아 있다. 성녀, 도은의 반대쪽 좌석에 앉아 있다.
성녀, 도은을 흘끔흘끔 본다.
성녀 종점까지 가?
도은 어떻게 아셔요.
성녀 반나절 넘게 안 내리길래. 우리 둘만 남았잖아.
도은 네.
성녀 중간에 내릴 기회는 있었어. 절망에 대한 인지, 솜털 같은 희망, 파산하고 나서 오는 회생, 자기 합리화, 이런 역들을 다 지나치고 종점까지 버티기가 쉽지 않지.
도은 그런가 봐요. 처음에 탈 때는 다들 의지가 넘쳐 보였는데. 어떻게 중간에 다 내리나요.
성녀 유행처럼 레테 레테 하지만 막상 아무나 가는 건 아니지. 아까 어떤 젊은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탄 것 있지? 식겁했다니까. 그래도 내려서 다행이야.
도은 걔들은 소풍 못 간다고 아쉬워하겠죠.
성녀 (악수를 청하며) 난 대장암 말기.
도은 아…….
성녀 아예 손쓸 수가 없대. 그래서 그냥 맘 편이 떠나기로 했어. 가족한테 짐 안 되게.
도은 네에.
성녀 보아하니 아직 건강해 보이는데 왜?
도은 …….
성녀 결혼은?
도은 했는데요.
성녀 근데?
도은 딸이 먼저 떠났구요.
성녀 (혀를 찬다.) 어쩌다.
도은 아팠어요.
성녀 에효.
도은 괜찮아요. 좋은 날 떠났어요. 단풍잎이 빨갛게 변했을 때.
성녀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야. 우리 다 그 중간쯤에서 살아.
도은 그래요? 전 잘 모르겠어요. 감정이 아예 궤도를 벗어났나 봐요. 그 후론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남편은 달랐어요. 어찌나 잘 웃는지.
성녀 서운했겠다.
도은 서운하다기보다. 이해가 안 갔어요. 나보다 더 그 앨 사랑했거든요.
성녀 그럼. 그게 진짜 웃는 게 아니었나 보다.
도은 그럴 수도 있어요?
성녀 그럼. 우리 다 그렇게 사는걸. 억지웃음 지으면서.
도은 바본가 봐요. 그런 단순한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성녀 이제 알았다고?
도은 남편이 떠났거든요.
성녀 어디로?
도은 실종됐는데. 경찰이 그러는데. 레테로 갔대요.
성녀 그랬구먼.
도은 네에.
성녀 그래서 따라가는 거야?
도은 네.
성녀 한 번 더 생각해 봐.
도은 뭘요.
성녀 가는 거.
도은 이미 끝났어요.
성녀 아이 떠나고 나서 웃지 못했다고 했지?
도은 네.
성녀 울어 본 적은 있어?
도은 …….
성녀 없어?
도은 아마도.
성녀 혹시 눈물이 한 방울이라도 난다면 가면 안 되는 거야. 고비사막처럼 통증조차 없을 때 모든 게 다 메말랐을 때. 그때 떠나.
도은 아주머니는요?
성녀 나?
도은 네.
성녀 난 마르다 못해 딱딱해졌지. 고비사막에서 천 년쯤 산 것처럼.
도은 가족은요?
성녀 아들이 있어. 우리 아들…… 잘 컸는데…….
도은 어? 아주머니 눈물 나요.
성녀 (눈물을 닦다가 당황하며) 아. 이거 하품해서 흘린 거야.
도은 가면 안 되는 건 제가 아니라 아주머니네요.
성녀 애를 혼자 키웠어. 애를 위해 살았어. 근데 이제 와서 애한테 짐을 지우라고? 절대 싫어.
도은 떠나는 게 아들을 위하는 거라 생각하세요?
성녀 (눈물 주체가 안 되고)
도은 아저씨! 내려 주세요!
버스, 정차하는 소리.
도은 고비사막은요. 무슨. 흘러넘치는 한강이네요. 내리세요. 어서요.
성녀 젊은 사람 말리려다가 왜 내가 울고 자빠진 거야…….
도은 어서 내리세요.
성녀 그럼 같이 내리자.
도은 싫어요. 전 끝까지 가요.
도은, 성녀를 일으킨다.
성녀, 어쩔 수 없는 듯 일어난다.
성녀 돌아가면 안 돼. 아들 힘들어.
도은 그럼 울 거 다 울고 다시 타면 되겠네.
성녀, 버스에서 내린다. 하지만 내리고 나니 안도감이 든다.
성녀 새댁은? 정말 메마른 거 맞아?
도은 완전히요. (창밖으로 성녀에게 손을 흔든다.)
버스, 다시 출발하고 도은 버스 안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다.
도은, 창밖을 본다.
바람 소리가 창문을 파고든다.
도은, 귀를 막는다.
도은 아저씨.
기사(목소리) 왜요?
도은 좀 살살 달려 주세요.
기사(목소리) 살살 달리고 있어요.
도은 조금만 더 살살요. 바람 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요.
기사(목소리) 그래?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도은 이게 안 들린다구요? 비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내려요.
기사(목소리) 초가을에 태풍이 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 천재지변을 어쩔 수 없지 뭐.
도은 레테까지는 얼마나 남았어요?
기사(목소리) 이제 두 정거장인데, 강을 건너야 해서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강물이 점점 불어나고 있거든.
도은 그럼 어떡해요?
기사(목소리) 다음 정거장에서 비상 정차할 테니까 태풍이 사그라들면 그때 다시 타요.
도은 다음 정거장이요?
기사(목소리) 뭐 어차피 가는 건데 좀 더 있다 가도 상관없잖아?
버스가 끽 하고 선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