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6)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5장 


교대역 거북이 곱창     

원형 알루미늄 테이블에서 곱창을 구워 먹고 있는 상우와 현서.

상우는 소주병을 뒤집어 팔꿈치로 친 뒤 뚜껑을 딴다.      


상우   (현서에게 소주 부어주며) 대호 요즘 연애하냐? 

현서   왜?

상우   애가 요즘 얼이 빠졌어. 

현서   정확히 어떻게?

상우   말할 때 약간 겉도는 거 있잖아. 전화도 빨리 끊으려고 하고. 

현서   아닐걸. (소주 들이킨다.)

상우   니가 어떻게 알아?

현서   있으면 말했겠지. 

상우   어 이것 봐라. 너 설마 아직도 대호한테 마음 있냐?

현서   (상우 뒤통수 때린다.) 미친. 잔 비었어. 

상우   (뒤통수 잡으며 소주 따라준다.) 아, 말로 해. 

현서   마음 있으면 왜? 니가 도와줄래?

상우   너 진짜야?

현서   그럴 리 있어?

상우   아니지?

현서   넌 내가 그런 한가한 인간으로 보이냐?

상우   응. 아니지. 근데 너 학교 때 엄청 좋아했잖아. 우리 연극반에서 눈치 못 챈 사람 없을걸? 아! 딱 한 명 대호 빼고

현서   강력계 맛 한번 볼래? 강력계가 만만해 보이냐?

상우   전혀. 너 보면 알지. 안 그래도 거친 인간이 야생의 들개로 변신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고 있거든. 

현서   들개?

상우   너무 까칠해졌어. 너. 

현서   사람 죽는 거 하루에 한 번씩 본다고 생각해봐. 

상우   아직도 적응 안 됐어?

현서   평생 못 하지. 적응. 

상우   계속 그 일 하게? 야. 외모는 이래도 너도 연약한 여자다. 상관한테 잘 좀 말해봐. 좀 편한 쪽으로. 

현서   (뒤통수 때린다.) 연약한 여자? 연약한 니 뱃살이나 걱정해라. 

상우   아, 말로 해.   

   

대호, 들어온다.      


대호   미안, 늦었다. 

상우   왜 늦었는데?

대호   인터뷰. 

상우   그 특집?

대호   응. 김현.

현서   꼬라지 보기 힘들다 요새?

대호   미안. 넌 잘 지냈냐?

현서   나 강력계로 옮긴 거 알지?

대호   알지. 근데 니가 자원한 거라며?

현서   응. 

대호   그게 적성에 맞냐?

현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상우   아직도 적응 중이란다. 

대호   (소주잔을 흔들며) 뭐가 제일 힘들어?

현서   사람 죽은 거 보는 게 제일 힘들지. 

상우   어휴. 난 진짜 못할 것 같아. 

현서   그것만 아니면 뭐. 

대호   (현서에게 소주 따라준다.) 정말 대단해. 너. 

현서   (잔 받으며 대호 쳐다본다. 눈빛 조금 반짝인다.) 김현이 누군데?

상우   화가 몰라?

현서   나 강력계에 있다고. 사람이 죽고 사는 와중에 그림 같은 거 볼 시간이 있었겠냐고. 

상우   아. 그래. 미안, 미안. 

대호   일반인은 잘 몰라. 전공자나 알지. 

현서   니들 사이에선 유명한 사람이냐?

상우   완전 유명하지. 그림이 얼마나 비싼데. 뉴욕 메트로폴리탄에도 들어가 있다고. 몇 억씩 하지?

대호   몇십 억. 

상우   컥. 

대호   니 말이 맞았어. 

상우   응?

대호   지난번에 갈궈서 미안해. 이혼소송 중인 것 맞대. 

상우   그지? 야. 내가 진짜 너한테 욕 얻어먹고 얼마나 어이없었는데. 잡지 쪽으로 흘러들어오는 건 거짓이 없어요. 얼마나 고급 정본지 알고 있냐?

대호   오늘 만났어. 그 와이프. 

상우   대박이네. 연락처는 어떻게 알고?

대호   누가 가르쳐줬어. 

상우   누가?

대호   그 딸이. 

상우   딸이 있어?

대호   아니. 딸이 없대. 

상우   그게 무슨 말이야?

대호   (생각에 잠긴 듯.) 아냐. 

상우   이 새끼 이렇다니까. 요즘. 얼빠진 것처럼. 

현서   내 눈엔 정상으로만 보이는구먼. 

상우   너 연애하냐?

대호   (자기 잔에 소주 따른다.)

현서   연애는 개뿔. 

대호   ….

상우   봐. 부정을 안 하잖아. 누구 만나는데?

현서   (대호를 바라본다.)

대호   물어볼 게 있는데. 

상우   응. 말해봐. 

대호   어떤 사람을 만났어. 그리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 그 사람은 무척 진실돼 보였어.  오 재밌어지는데?

상우   오 재밌어지는데?

대호   그런데 그게 다 거짓이었다면?

상우   뭐가 거짓인데?

대호   그 사람이 말했던 게 다 거짓이었다면 어쩔래?

상우   뭐, 학력 위조 같은 거 한 거야? 아님 나이를 속였나?

현서   꽃뱀한테 걸렸구만. 

대호   그런 건 아냐. 자기랑 상관없는 거짓말을 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준 정보가 도움이 되었어. 

상우   뭔 소리야. 야. 술이나 마셔. 

현서   꺼지라 그래. 속이기 시작하면 지구 종말이야. 

대호   (웃는다.) 지구 종말?

상우   일단 전화를 해서 따져. 따져 물어.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면 되지.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대호   (웃는다.) 걸었더니 다른 사람이 받아. 

상우   뭐?

현서   내 그럴 줄 알았다. 꽃뱀. 

상우   돈이라도 뜯겼냐?

대호   아니. 

상우   그럼 됐어. 그냥 잊어.

대호   잊히지가 않아.      


사이


상우   좋아하냐?

대호   그런 건 아냐.      


사이


현서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리 고민하고 있어. 야. 허구한 날 사람이 죽는 걸 보지? 연애고 사랑이고 돈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돼. 

상우   (대호에게 술 따른다) 또 시작.

현서   내 별의 별 시첼 다 본다. 너네 이 주 동안 부패한 시체 본 적 있냐? 

상우   고독사?

현서   이 주가 되도록 아무도 그 죽음을 몰랐다는 건 그 사람이 정말 외로웠단 거잖아. 그 외로움의 냄새. 그거 맡아봤냐. 그 냄새는. 그건 악취가 아니야. 그건 그냥 슬픔이야. 그건 평생 못 잊는 거야. 

대호   (술 들이킨다.) 외로움의 냄새. 퍽 공감각적이다. 

현서   목을 매단 사람은 왜 항상 눈을 안 감는 거야?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 그 눈동자에 담겨 있어. 난 그걸 봤어. 

상우   시를 써라 시를 써. 

현서   그림 나부랭이? 우리가 겪는 이 사소한 감정들? 연애?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대호   얘 은근 말이 감각적이지 않냐? 

상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연극반에는 왜 들어온 거야? 나는 너 통계학과 나와서 경찰 된 것보다 통계학과에서 연극반 들어온 게 더 미스테리야. 너 은근히 예술적 감성 있지? (놀리듯) 솔직히 말해봐.  

대호   몰랐어? 얘 감성 있어. 얘 연기 제법 잘했어. 처음엔 스태프로 참여할 줄 알았지. 그런데 딱 주인공! 

현서   그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역할이었다. 

대호   진짜 잘했어. (현서의 어깨를 토닥인다.)

현서   (몸 움찔하며 대호 쳐다본다.)

상우   그러게 얘 2학년 때 그거 하고 바로 연극반 나갔네. 난 얘가 연극반 리더 될 줄 알았는데.  

현서   (술 들이킨다.) 며칠 전엔 말야. 한강에서 어떤 여자 시체가 떠올랐지. 와 익사한 시체는 처음 봤네.  

상우   아 이제 시체 얘기 좀 그만해.

대호   어땠는데?

현서   (상우를 쳐다보며 놀리듯 말한다.) 물에 퉁퉁 불었지. 그리고 지금 여름이잖냐. 나머진 상상에 맡길게.  상우   어휴. 어? 얘 봐라. 너 일부러 그러지? 나 그런거 끔찍해하는 거 아니까 그러는 거잖아.  

대호   (술 들이킨다.) 야. 이것들아. 지금 이게 장난칠 소재냐. 응? 누군지 몰라도 안됐잖아. 가족들도 안됐고. 

현서   그래. 맞아. 정말 안된 일이야. 아직 신원도 몰라서 가족한테 인계도 못했어. 조사 중. 

대호   자살인가. 

상우   기사 났냐?

현서   아니. 타살 의혹도 있고 해서 언론은 막았어.  

상우   막기 힘들었을 텐데? 한강 어느 쪽이었는데?

현서   너네 기사 쓰지 마라. 

대호   네네. 

상우   야. 난 패션잡지에 있거든요. 

대호   난 문화부거든요. 

현서   동호대교 앞 커다란 유람선 같은 레스토랑 있지?

상우   대박. 거기 사람도 많이 다니잖아?

현서   근데 옷이 매우 특이했지. 일반적인 복장이 아니었어. 

대호   (곱창을 입에 넣으며) 무슨 옷인데?

현서   엄청 튀더라고. 

대호   왜?

현서   아주 깊게 파이고 새빨간 블라우스였는데.

대호   그게 언젠데?

현서   며칠 전에. 너 기사 쓰려 그러지?

대호   응?

현서   쓰지 마라. 

대호   응. 안써. 근데 며칠 전 정확히 언제?

현서   (묘한 느낌으로 대호 바라본다.)     


암전

이전 05화 붉은 여인의 초상(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