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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5)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초인종 소리,      


선예   미안해요. 기자님을 무리해서 부르는 바람에 약속이 겹쳤어요. 

대호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갑자기 전화를 드려서. 

선예   변호사예요. 이혼소송을 맡고 있죠. 잠시만요. (현관으로 가 문을 연다.)    

 

정장 차림의 변호사 들어온다. 선예와는 이미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모양새로 손에 쇼핑백을 들고 들어온다.      

변호사   한남대교에서 많이 막혔어요. 사고가 났는지 한참을 수습하고. 

선예   사고가요?

변호사   졸음 운전을 했는지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본네트가 완전히 박살이 났더라고요.   

선예   사람은 안 다쳤나요?

변호사   보질 못했어요. 그 정도 사고면 사람도 다쳤겠죠. 전 한참 뒤에 있었어요. 

선예   뒤에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이게 뭐예요?

변호사   한남동에 유명한 샌드위치집인데 선예 씨 샌드위치 좋아하시는 거 생각나서 사 왔어요. 에멘탈, 브리, 또 하나 뭐더라. 여튼 뭐 치즈가 세 개가 들어갔대요. 

선예   고마워요. 완전히 취향 저격이에요. 

변호사   아. 고다요. 고다 치즈. (한참을 얘기하다 뒤늦게 대호를 본다.) 손님이 계셨네요?

선예   아. 제가 깜빡. 여기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님이세요. 

변호사   안녕하세요. (명함을 꺼내 대호에게 건넨다.) 이혼소송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변호사입니다. 

대호   안녕하세요. (명함을 받아 보고 자신도 명함을 건넨다.) 제가 두 분 약속에 괜히 방해가 되었습니다. 

선예   아니에요. 기자님 계셔도 괜찮아요. (변호사 눈치를 보며) 괜찮죠?

변호사   그럼요. 오히려 더 좋습니다. 전 사실 조금은 언론에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선예 부엌으로 간다. 


대호   소송 이야기를 기사에 적지는 않을 겁니다. 

변호사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는 뉘앙스라는게 있으니까 기자님이 조금 더 진실을 쫓아가시길 바랍니다. 김현 화가는 늘 언론과 함께죠. 호의적인 쪽으로요. 선예씨 가 공격적인 포지션은 원치 않으셔서 저도 언론과 접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게 생각보다 많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대호   가진 거요?

변호사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 기계적으로 그것을 기술로 구현한 사람. 과연 어느 쪽이 그림의 주인일까요?

대호   거기 정답이 있나요? 

변호사   4차 산업혁명 시대 아닙니까. 기술은 기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인간에게서만 나올 수 있죠. 

대호   아이디어도 나오던데요. 컴퓨터가 쓴 소설 읽어보셨습니까? 꽤 그럴듯하죠. 

변호사   알고리즘의 배합으로 만든 소설은 아무런 영혼도 가지지 못합니다.

대호   글쎄요. 영혼이 있다, 없다는 누가 판단하죠. 

변호사   종교가 없으십니까?

대호   무신론자입니다. 

변호사   영혼은 구현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거죠. 

대호   존재하는 것과 구현되는 것의 차이가 뭐죠?

변호사   존재한다는 건… (잠시 머뭇거린다.) 탄생하는 겁니다. 인간처럼요. 

대호   예술이 탄생한다… 흔한 말인데 이렇게 들으니 새롭네요. 변호사님은 종교가 있으십니까?

변호사   종교는 없습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건 존재한다고 봅니다. 신을 믿는다는 건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는 걸 용이하게 해주죠. 

대호   어떤 가치판단이죠?

변호사   진짜 예술과 가짜 예술에 대한 가치판단이요. 신을 믿듯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이 있죠. 세상 밖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틀을 깰 수 있는 겁니다. 김현 작가에게는 그게 없었어요. 삶이라는 틀에 갇혀 더 나아가지 못했죠. 나아가는 건 선예 씨 몫이었습니다. 

대호   (웃는다.)

변호사   왜 웃으시죠?

대호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변호사님이 이토록 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게 흥미로워서요. 

변호사   선예 씨 변호를 하면서 저도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대호     (부엌에 있는 선예를 바라본다.) 

선예   (둘의 대화를 무심코 듣고 있다가 대호와 눈 마주친다.)     


사이


대호   전 김현 화가가 이혼소송 중이라는 사실은 친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고요. 

변호사   친구가요? 

대호   잡지 쪽에 있는데 그 녀석이 원래 마당발이라 소문에 밝죠. 

변호사   소문이… 무섭군요.     


사이     


대호   지난번 전시 때 옆에 계신 분이 사모님인 줄 알았습니다. 

변호사   쭉 그렇게 공개적으로 함께 다니고 있죠. 선예 씨에게 예의가 아닌 거죠.      

자른 과일과 함께 변호사가 사 온 샌드위치를 세 조각으로 잘라 가져온다.      

선예   드세요. 

변호사   혼자 드시지. 

선예   너무 많아요. 같이 먹어요. 

대호   감사합니다. (과일을 하나 집어 먹는다.) 가지고 있다는 게 궁금합니다. 

변호사   보시면 아실 겁니다. 우리가 왜 유리한지요.     


사이     


선예   (노트를 가지고 온다.) 현이 초창기 작품부터 모든 색은 제가 만들었어요. 그건 색을 배합한 저만의 비법을 정리한 노트예요. 모두 제 자필로 적었고요. 제가 염색 공장에서 일했다는 건 알고 계신다고 했죠?

대호   네. 

선예   전 그때 색 공부를 많이 했어요. 천을 염색하는 일이 저에게는 하나의 예술 작업이었죠. 현이는 무척 전형적으로 물감을 배합해요. 그런데 전 독창적인 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죠. 

대호   이를테면요?

선예   물감 이외의 색이죠.

대호   물감 이외의 색이라는 게?

선예   기자님이 무언갈 바라보는 그 눈동자. 이 샌드위치 속의 세 가지 치즈의 조합. 변호사님의 재킷. 이것들이 물감으로만 표현된다면 너무 단순하잖아요. 우리가 눈에 담는 건 그 이상의 것이죠. 우리가 보고 느끼는 걸 더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색을 찾아야죠. 누구도 쓰지 않은 색이요.

대호   그런 걸 어떻게 찾죠?

선예   그냥 일상에서요. 

대호   일상이요?

선예   네. 제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하던 일이 그걸 찾는 거였어요. 하지만 현이는 거기 큰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색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작 본인은 몰랐죠. 그 애가 평단에서 주목받았을 때 거긴 두 가지 포인트가 있었어요. 하나는 독창적인 사람의 표정,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색! 색이었죠. 

대호   기억나네요. 평론가들도 어떤 배합인지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게요. 

선예   고흐도 늘 색을 만들어 썼죠. 전 색이 진실을 담는다고 생각해요. 

대호   진실을요?

선예   기자님도 진실을 취재하는 것 아닌가요?

대호   그렇죠. 

선예   그림도 진실을 전해야 해요. 색만이 온전히 그것을 전할 수 있죠. 저는 자연 재료를 이용했어요. 

대호   자연 재료라면? 

선예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재료였죠. 방부처리는 제 전문이니까 작업이 쉬웠어요. 둥지 연작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둥지를 직접 보기 위해 산엘 갔어요. 둥지 밑으로 새가 떨어져 있었죠. 아기 새였어요. 그것을 안아 들자 아직 따뜻했어요. 난 그 새를 내 스카프로 싸서 집에 데리고 왔어요. 그것으로 색을 만들고 싶단 욕구가 솟구쳤어요. 결국 그것으로 나만의 붉은색을 만들었죠.      


사이


대호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림이 김현 작가의 손에서 그려진 이상 어떤 이유로든 임선예 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선예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현이가 그 뒤로 그런 그림을 또 그릴 수 있던가요? 보셨죠? 요즘 그리는 그림들이 얼마나 흔해 빠진 삼류 풍경화인지. 

변호사   지금 이 기나긴 소송에서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둥지 연작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붉은 여인의 초상 한 점입니다. 

대호   왜죠?

선예   네?

대호   수많은 그림 중에 왜 하필 그 한 점을 놓고 싸우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예   나의 젊을 때 모습이 가장 정확히 표현되기도 했고. 그래선지 꼭 내가 낳은 자식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지금 꼭 양육권 싸움을 하는 기분이에요.  

대호   혹시 그 그림이 그 그림입니까?

선예   네?

대호   그 아기 새 말입니다. 

선예   네. 맞아요.      


침묵     


선예   아직도 기억나요. 그것을 품에 안았을 때 내 손으로 전해지던 그 체온. 아직 남아 있던 체온. 죽었지만 남아 있던 그 따스함. 그래서일까요. 그 그림에서도 체온이 느껴져요.       


침묵

변호사, 헛기침을 한다.      


대호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일어나보겠습니다. 

변호사   (불안한지 일어서며) 기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대호   제가 쓰는 기사는 김현 작가님의 화풍에 대한 거지 개인사에 대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변호사   ….

선예   그런데 왜 자꾸 개인사를 취재하시는 거죠?

대호   네?

선예   그림 자체를 보고 평가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림에 모든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굳이 절 찾아오신 거죠?

대호   ….

선예   기자님도 알고 계신 거죠. 그림과 삶을 떼어놓고 얘기할 순 없죠. 그게 우리와 컴퓨터가 다른 점이에요.

변호사   정확합니다.

대호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으며) 누가 그러더군요. 까미유 끌로델이 자신의 영감을 빼앗긴 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요.

선예   절 까미유 끌로델에 비유하시는 건가요?

대호   따님이 그러더군요. 

선예   누구 딸이요?

대호   두 분 딸이요. 김현 작가님과 임선예 님 사이의 딸 말입니다. 

변호사   딸이요?

선예   전 딸이 없는데요.      


셋,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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