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3장
화실
상인이 운영하는 화실 겸 미술 학원
곳곳에 이젤이 놓여 있고 벽에는 학생들이 그린 듯한
아마추어적인 소묘와 수채화 그림들이 걸려 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상인은 귀에 붓 하나를 꽂고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상인의 그림은 추상화다.
대호, 들어온다. 상인의 옆으로 다가가 그림을 본다.
상인 (계속 그림을 그리며) 왔냐?
대호 열심히네?
상인 거기 앉아.
대호 기다릴게. 천천히 해. (의자로 가 앉는다.)
상인 다 끝났어.
대호 멋진데?
상인 시립 미술관에라도 걸릴 대단한 예술작품이면 좋겠다만 기껏 티셔츠에 들어갈 도안인걸.
대호 야 그것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 어딨냐. 잘 팔린다며?
상인 그것도 옛말이다.
대호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옛말이야?
상인 처음에나 반짝 반응 좋았지, 짝퉁 시장 너무 잘 돼 있어서 다 갖다 베끼더라.
대호 야, 당하고만 있었어?
상인 뭐 해봐야 얼마나 번다고 그걸 대응하고 그러냐. 나도 그림이나 그릴 줄 알지 그런 쪽엔 젬병이잖냐. 그냥 귀찮아서라도 뒀다.
대호 야 씨. 그걸 참냐.
상인 내 본업도 아니고. 애들 가르치는 거나 신경 써야지.
대호 그건 잘 되지?
상인 (붓을 물에 씻는다.) 그것도 잘 안된다.
대호 왜?
상인 (물통을 비운다.) 입시에 실기 비중이 줄어서 그렇지 뭐.
대호 난 개인적으로 그거 이해가 안 가더라.
상인 시대의 흐름 아니겠냐. (앞치마를 벗어 건다.)
대호 시대의 흐름?
상인 (이젤을 접으며) 그림 그리는 기술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할 때잖아.
대호 기술도 중요하지!
상인 너랑 나랑 미술 학원 다니던 때나 기술이 중요했지. 지금 그건 컴퓨터가 더 잘해. 디자인 뿐 아니라 회화도 기가 막히단 말이지.
대호 난 컴퓨터로 그린 건 좀 어색하고 딱딱하게 보이던데.
상인 그건 니가 편견을 가지고 봐서 그래. 이번 미국 대형 공모전에도 AI가 그린 그림이 수상했어. 심사위원들은 그게 사람이 그린 건 줄 알고 심사했지. 무서운 게 뭔 줄 아냐? 컴퓨터는 이제 인간의 빈틈까지 담을 줄 알아. 인공지능은 진화하고 있어. 매일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그래서 이젠 아이디어가 중요한 시대야. 대학도 그걸 아니까 실기 비중을 낮추고 공부 잘하는 애들로 뽑겠다는 거지. 아. 그런데 언젠간 아이디어도 걔네가 뛰어넘을거야.
대호 걔네?
상인 컴퓨터.
대호 가능한가.
상인 대호야. 그래도 아직은 미대 가고 싶은 애들 많아서 나 먹고는 산다. 기자 월급보단 나을걸?
대호 당연하지. 쥐꼬리 박봉이랑 뭘 비교하냐.
상인 뭐 먹을래?
대호 고기?
상인 어이쿠.
대호 농담이고!
상인 한우집 가자.
대호 진짜?
상인 등심 먹을래?
대호 완전 좋지.
상인 양대창도 사줄 수 있어.
대호 야. 너 잘 안 되는 게 이 정도면.
상인 알아, 알아. (물감을 정리하며) 외근이었다며 일은 끝났고?
대호 응.
상인 뭐 쓰냐, 요새?
대호 김현 특집.
상인 김현?
대호 응
상인 그 김현?
대호 당연하지.
상인 이야. 만나봤어?
대호 응.
상인 어떠냐? 점잖지?
대호 응.
상인 와 대박이네. 짜식, 많이 컸네?
대호 요즘 그림 봤냐?
상인 슬쩍 봤지. 기사 떴길래.
대호 어떠냐?
상인 뭐가?
대호 뭐 달라진 거 못 느꼈어?
상인 뭐가 달라졌는데?
대호 인물화 그리던 김현이 풍경화 그리잖아.
상인 아 그거? 김현도 늙긴 늙었구나 싶었는데? 나이 들수록 자연이 좋잖아.
대호 느낌이 미세하게 달라졌단 말야.
상인 그런가? (휴대폰을 검색한다.) 좀 차분해졌네.
대호 그지?
상인 너무 안정적이고.
대호 인물화에 비해선 어때?
상인 확실히 매력은 떨어졌네. 내면을 재구성한 느낌이 아니야. 있는 그대로 빼다 박아놓은 거 같은, 그냥 사실적인 느낌? 상상력 고갈?
대호 역시 너는 솔직하구나.
상인 평단에선 뭐래?
대호 그냥 좋다고만 하지.
상인 거기도 카르텔이 있으니 못 건드리겠지.
대호 분명 다들 느낄 텐데 아무 말을 안 해.
상인 거기가 원래 그렇다. 그래봐야 주류로 들어가지 못한 내 변명거리처럼 들리겠지만.
대호 근데 그동안의 그림을 누군가가 대신 그려줬다면?
상인 응?
대호 만일 그동안의 그림을 누군가가 대신 그려줬고 그 사람과 결별한 뒤에 본인이 그린 그림이 이거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 수 있을까?
상인 그건 무슨 엉뚱한 생각이냐? 그동안 누가 국내 최고의 화가 김현의 그림들을 대작을 해줬다 이거냐? 너 혼자 생각인 거야? 아님 음모론이라도 있는 거야?
대호 그냥 혼자 생각.
상인 니 생각이 엉뚱하긴 하다만 그런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니까?
대호 이를테면?
상인 (대수롭지 않게) 마가렛 킨 월터 킨 사건 알지?
대호 빅 아이즈?
상인 그래. 그거 영화로도 나왔잖아. 월터 킨이 마가렛 킨 그림을 제 이름으로 발표해서 유명세를 탔지. 마가렛 킨이 소송을 걸었고 결국 판사가 법정에서 두 사람에게 각자 그려보라고 해서 들통났지. 법정에서 그림이라도 직접 그려보게 해야 하나? (웃는다.)
상인, 미술 학원 뒷정리를 하며 나갈 채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대호, 혼자만의 생각에 잠시 빠진다.
상인 나가자.
대호 (일어난다) 그래
상인 밥 먹으면서 더 얘기해줘.
대호 뭘?
상인 너의 그 음모론을 말야. 너무 재밌는걸?
대호 이게 다야. 더는 없어.
상인 뭐냐. 말을 꺼내다 말면 안 되지.
대호 혹시 나중에 뭔가가 정리되면 더 말해줄게.
상인 싱겁네. 차 가져왔어?
대호 아니.
상인 그럼 소주 한잔 가능?
대호 당연히.
상인 가자.
상인, 화실의 불을 끄고 대호와 함께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