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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2)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2장


한강     

한강 고수부지 강 건너 불빛이 가득하다. 두 사람 천천히 걷는다.    

  

대호   (여인의 눈치를 본다.) 걷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여인   꼭 그렇지도 않아요.

대호   아무 말씀 없이 여기까지 걸어오셔서. 

여인   여길 오고 싶었어요. 동호대교 옆 유람선처럼 생긴 식당. 서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강 건너 저 불빛들이 꼭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아름다워요. 서울에서 산다는 게요. 실제로는 냉혹한 현실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면 장난감처럼 그저 작고 예쁘게만 느껴지거든요. 

대호   평소에 그냥 지나치곤 했는데 오랜만에 자세히 보네요.

      

사이, 어색한 침묵      


여인   아버지의 그림이 왜 최근에 풍경화인지 알고 싶으신 거죠?

대호   네. 

여인   까미유 끌로델 알죠?

대호   네?

여인   로댕의 연인. 

대호   네 물론이죠. 

여인   까미유 끌로델이 정신 질환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세상은 그 이야기를 페미니즘으로 엮어내요. 난 그게 너무 뻔한 스토리라고 생각해요. 창의력이 그렇게 없나?

대호   네? 

여인   저는 그녀가 여성이었던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나약했어요. 그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왜 남자를 사랑해요? 멘탈만 조금 강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까미유 끌로델의 이름을 알고 있겠죠. 자기 영감을 빼앗긴 것도 자긴데 누굴 탓해요? 그건 무능해서지 여성이라서가 아니에요. 사회성도 능력이에요. 사랑은 예술을 망가뜨려요. 공과 사를 구분하면서 자기 작품을 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거예요.

대호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여인   아버지의 작품은 다 어머니가 그린 거예요. 

대호   네?

여인   어머니가 그린 거라구요. 

대호   어머니라면. 아까 그 전시 기획자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다.) 오미현? 

여인   아뇨. 제 어머니는 임선예예요. 

대호   네?

여인   임선예라고요. 제 어머니 이름이요. 

대호   하지만 아까 그분이 아내라고 했는데요?

여인   불여시가 하나 달라붙었죠. 그간 어머니가 해온 모든 업적을 훔쳐 갔죠. 어머니가 없인 아버지는 손발이 다 잘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혼자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대호   저. 

여인   제가 좀 흥분했죠.

대호   정말 따님이 맞습니까?

여인   제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 

대호  아까부터 이상했던 게요. 김현 작가는 이제 40대 후반인데 이렇게 장성한 따님이 있다는 게. 

여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만났어요. 아버지는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염색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죠.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이 살았어요.

대호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건 완전 특종인데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시나요? 네. 제가 기자 정신이 조금 떨어지는 걸 수도 있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건 완전히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얘기라. 

여인   제가 충동적으로 이런 말씀 드린다고 생각하세요?

대호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분이 아버지를 무지 싫어하는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연을 끊을 게 아니라면. 내일이 되면 이런 말 한 걸 후회할 수도 있어요. 

여인   싫어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화가로서는 싫어하는데 인간으로서는 사랑하고. 그래요. 아버지가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면 본인이 인정해야죠. 본인 그림이 본인 게 아니라는 걸. 

대호   정리해보죠. 그럼 기존의 인물화들이 다 어머니 그림이다? 

여인   (고개 끄덕인다.)

대호   아버지가 어머니 그림을 자기 걸로 발표했다?

여인   (고개 끄덕인다.)

대호   그럼 새로 그린 풍경화들은?

여인   그건 아버지 작품이죠. 댁도 느끼셨잖아요. 잘은 그렸죠. 그런데 그 이상의 뭐가 없잖아요. 

대호   글쎄요. 

여인   아버지가 어머니랑 사이가 벌어지면서부터 어머니 도움을 거부했죠. 까미유 끌로델을 잃어버린 로댕이 몇 년이나 갔을 것 같아요? 사실 그때부턴 로댕은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요. 하지만 그 이름은 영원히 남았죠. 아버지도 그러겠죠. 뭐 아쉬울 게 없는 눈치예요. 교수에 돈도 많겠다. 그 전시 기획잔지 불여시랑 붙어 다니면서 아주 행복해 죽으려 하죠.

대호   따님의 속상한 마음 이해합니다. 

여인  전 할 말 다 했어요.

대호   어머니가 그림을 그렸다는 걸 어떻게 입증할 수 있나요?

여인   네?

대호   아.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여인   어머니가 그 증인이죠. 지금 소송 중이에요. 

대호   아! (무언가 생각난 듯) 

여인   (한강을 바라보며) 저도 그림을 그려요. 제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아세요?

대호   아뇨. 

여인   세상의 소모품처럼 살다가 그림을 그릴 땐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 같거든요. 

대호   소모품이요. 

여인   어머니도 그랬을 거예요. 

대호   그렇군요. 

여인   아! 숨통 트이고 좋다. (대호에게 손 내민다.) 오늘 반가웠어요. 덕분에 이 쓸쓸한 길 동행자가 생겨서요.

대호   (악수에 응하며) 한 번 더 뵐 수 있을까요?

여인   (웃는다.) 왜요? 저한테 반하기라도 하셨어요?

대호   네? (사이) 솔직히 이런 분한테 반하지 않는다는 게 힘든 일이라. 

여인   이런 분?

대호   미인이요. 

여인   농담이시죠?

대호   농담 반 진담 반이요. 

여인   뭐 하러 한 번 더 봐요. 그냥 지금 좀 더 보면 되죠. 

대호   네?      


여인, 무대 밖으로 걷는다. 

대호 무언가에 홀린 듯 여인 따라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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