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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4)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4장


선예의 집     

선예의 아파트 거실. 간소한 살림살이지만 꽤나 고급스러운 소품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디자이너의 시계, 대리석 티 테이블, 고급 브랜드의 디퓨저 등. 벨이 울린다. 화면을 확인하고 문을 연다. 대호. 들어온다.      


대호   안녕하세요. 

선예   안녕하세요… 기자님?

대호   네. 한국신문 이대호 기잡니다.

선예   들어오시죠.  

    

대호, 들어오며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집을 살핀다.     


선예   앉으세요. 

대호   네. 감사합니다. 

선예   커피 드세요?

대호   네. 좋습니다. 

선예   (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내린다. 드르륵 소리)

대호   집이 참 멋집니다. 

선예   작죠. 혼자 살긴 딱 좋아요.  

대호   감각이 느껴집니다. 

선예   (웃는다.)

대호   전 이런데 꽝이라. 

선예   (커피를 테이블에 놓으며) 문화부 기자시면 감각이 있을 것 같은데. 예쁜 거 좋은 거 많이 취재하실 테니까요. 

대호   지식이 있는 것과 실제 감각은 다르더라고요. 미학과를 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공부하긴 했지만 왜 내 집은 아름답게 꾸밀 수 없는 걸까요. 

선예   (웃는다.) 별개의 문제이긴 해요. 

대호   저도 한때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저에겐 그 타고난 재능 같은 게 없는 걸 깨달았죠. 

선예   오래 그리셨어요?

대호   원래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론 중학교 때부터 그렸어요. 예고 입시에 실패하고 나니 미술 학원에서도 더는 권하지 않더군요. 넌 머리가 좋으니 그냥 공부 쪽으로 가라. 그게 부모님의 뜻이었죠. 

선예  왜 남의 말에 신경 써요. 재능이라는 게 누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본인이 본인을 믿으면서 끈질기게 붙잡고 가는 거죠. 

대호   아.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구요.      


잠시 사이. 어색하다.      


대호   여튼 이렇게 취재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예   얼결에 허락하긴 했지만.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대호   전 그저 김현 작가의 그림에 대한 특집 기사를 쓰고 있어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사적인 부분은 기사에 넣지 않을 거니 걱정 마십시오. 

선예   다행이네요. 

대호   이혼소송 중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왜 쉽게 합의가 안 된 겁니까?

선예   그건.

대호   기사에는 적지 않겠지만 불편하시면 넘어가셔도 됩니다.  

선예   아니에요. 사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저흰. 그림에 대한 소유권 분쟁 중이에요. 

대호   아!

선예   제가 도저히 포기 못 하는 그림 한 점이 있어요. 그건 남편도 포기 못 하구요. 

대호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선예   제가 들고 있어요. 

대호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선예   (일어난다.) 죄송하지만 보여드릴 순 없어요. 

대호   아.

선예   그림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자기 혐오감이라고 해야 하나. 

대호   자기 혐오감이요? 김현 작가 그림에 자기 혐오가요?

선예   여튼 그랬어요. 

대호   아… 따님이….

선예   네?

대호   아닙니다. 왜 이제야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거죠?

선예   네? 

대호   그림을 대신 그렸다면. 

선예   네?

대호   그림을 대신 그려주신 것 아닌가요?

선예   그건 무슨 말이죠?

대호   (의아하다.)

선예   누가 그래요? 전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대호   하지만 그림을 대신 그리신 것 아닌가요?

선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대호   아. 제가 잘못된 정보를… (사이) 그런데 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거죠?

선예   그 그림 속의 인물이 저니까요. 

대호   네?      


사이     


대호   그렇다고 그림이 본인 소유가 되는 건 아니죠. 

선예   현이 학생 때부터 전 25년간 현이의 모델이었어요. 이젠 이렇게 늙어버려 소용없게 되었지만요.  

대호   아직 아름다우신데요. 

선예   그리고 그림에 대한 그 아이디어들이 다 저에게서 나왔죠. 

대호   아이디어가요?

선예   둥지 그림 아시죠?

대호   아! 여인의 머리에 둥지가 올라간 그림 말씀이시군요. 둥지 연작 시리즈요!

선예   네. 둥지를 그리자고 한 것도 저였죠. 전 아주 어릴 때부터 가끔씩 내 머리 위에 둥지가 하나 올라가 있다고 상상하곤 했어요. 그 때문에 가짜 두통에 시달리긴 했지만요. 

대호   슬픈 여인의 표정 위로 생동감 넘치던 그 둥지가 묘한 대조를 이루었죠. 인상적인 연작이었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임선예님의 것이었군요. 

선예   네. 이 정도면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가요?

대호   애매한 문제군요. 

선예   사실 모든 그림이 그랬어요. 현이가 데뷔한 후 20년간 거의 인물화만 그린 건 아시죠?

대호   네. 평단의 주목을 받은 것도 그 신비로운 여인의 얼굴과 표정 눈빛과 입매. 모나리자에 견줄 만한 알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죠. 

선예   작품을 그릴 때마다 제가 옆에 있었어요. 현이는 제가 시키는 대로 그렸죠. 색도 늘 제가 만들었죠. 

대호   색을요?

선예   (한숨 쉬며 소파에서 일어난다.) 전 숨은 조력자였죠. 무척 많은 영향을 행사하던 조력자요. 지금은 고작 이런 신세지만요. 

대호   이런 신세라뇨. 

선예   보시다시피요. 저에겐 아무것도 없어요. 현이는 모든 부와 명성을 다 얻었죠. 

대호   아쉬움이 남으십니까? 

선예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렸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대호   원래 그림을 좋아하셨습니까?

선예   완전히 미쳐 있었죠. 사실 현이보다 제가 더 미술에는 미쳐 있었어요. 우리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를 했던 적이 있어요. 현이와 그곳엘 갔죠.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여인이 마치 저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울었어요. 창밖으론 도시가 펼쳐지고 그 함축적인 세계가. (사이) 그 느낌은 충격이었죠. 그 뒤로 전 전시란 전시는 다 다녔죠. 하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몰랐어요. 배우기도 힘들었고요. 

대호   김현 작가는 쭉 미술을 하셨나요?

선예   현이도 저처럼 미술을 배울 형편이 안 된 건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큰아버지가 재력가였어요. 큰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었는데 거기서 도움을 받았어요. 늦게 시작했는데 스펀지처럼 모든 걸 빨아들였죠. 현이가 워낙 머리가 좋아요.  

대호   대단하군요. 

선예   좀 괘씸하기는 해요. 

대호   네?

선예   현이의 옆에 그 여자. 보셨어요?

대호   네… 사실. 몰랐습니다. 이렇게 법적인 부인이 계실 줄은요. 

선예   뭐. 떨어져 산 지 3년째라. 

대호  그림이고 뭐고 빨리 이혼하시지 그랬어요. 

선예   네?

대호   저 같으면 더러워서라도 빨리 갈라설 것 같은데요. 

선예   (웃는다.)

대호   아.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이입을. 

선예   이혼을 안 해주는 쪽은 그쪽이에요. 

대호   왜죠?

선예   내가 원하는 건 붉은 여인의 초상 하나거든요. 다른 둥지 연작 시리즈는 모두 본인이 가지고 있는데도 고집을 부려요.  

대호  이해가 안 가네요.

선예   저도 알고 싶어요. 그냥 이것만 주면 깔끔하게 헤어져줄 텐데. 그 여잘 생각해서라도 빨리 서류정리가 되는 게 좋을 텐데 말이죠.  

대호  그렇긴 하죠. 

선예   현이의 그림에서 색은 무척 중요했어요. 거기 제 역할이 컸죠. 한때 제가 염색 공장에서 일했거든요. 

대호  네. 알고 있습니다. 

선예   생각보다 저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전 한 번도 인터뷰를 한 적이 없는데요. 

대호   그건 따님이. 

선예   자꾸 따님, 따님 하는데 그건 무슨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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