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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7)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6장 


선예의 집   

   

거실에 걸려 있는 붉은 여인의 초상. 머리에 둥지를 이고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오묘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림 속 여인은 앞서 현과 선예의 딸로 소개된 여인과 모습이 같다. 여인이 쓰고 있던 모자와 그림 속의 둥지는 그 색감과 디자인이 닮았다.      


변호사   사무관이 그러는데 오늘 변론이 정말 괜찮았다고 기대해도 되겠다고 하더군요. 

선예   감사해요. 변호사님 덕분이에요. 

변호사   삼 년이나 함께했지만 꽤 큰 수임료를 받고 선예 씨에게 고작 그림 하나 얻게 해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그래요. 

선예   그런 걱정 마세요. 저게 우리 작품 중엔 최고예요.  

변호사   그림은 어떻게 하시게요?

선예   그냥 가지고 있을 거예요. 

변호사   지금 당장 팔아도 괜찮을 텐데요. 

선예   돈으로는 못 매겨요. 

변호사   저희 집에도 조선 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병풍이 하나 있었거든요? 어릴 때 기억이지만, 호랑이도 거북이도 나오고 꽃도 있었고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멋지고 화려했죠. 우리 집 가보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집이나 땅은 팔아도 병풍은 팔지 마라. 

선예   당연한 거 아닌가요?

변호사   하지만 IMF 때 아버지가 빚을 갚기 위해 다 팔았죠. 엄청난 헐값에요. 우스운 얘기죠. 

선예   안타깝네요. 

변호사   그때 생각했어요. 아무리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소중한 걸 알아보는 눈이 없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선예   소중한 걸 알아보는 눈….     


초인종 소리. 선예, 화면을 본다.     


선예   현이에요. 

변호사   네?     


현, 비번 누르고 들어온다.      


선예   (놀란다.) 뭐야. 니 맘대로.

   손님이 있어?

선예   비번이….

   그대로잖아. 

선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변호사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댁이 상관할 바 아니구요. 선예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변호사   어쩔까요?

선예   (고민한다.)

변호사   옆에 있어드릴게요. 

선예   아녜요. 잠깐 비켜주세요.  

변호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왜요? 내가 뭐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아서요? 나 아직 이 사람 법적 남편이고 이 집 주인이에요.

선예   술 마셨어?

변호사   어쩌실 거예요?     


선예, 망설인다.      


선예   잠시만 비켜주세요. 

변호사  정말 괜찮습니까?

선예   네. 괜찮아요. 

변호사   근처에 있을게요. 아니. 바로 앞 복도에 서 있을게요. 

선예   걱정 마세요. 

변호사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선예   네.      


변호사, 현을 쳐다보는 시선을 유지하며 나간다.     


  혹시 변호사랑 특별한 사이라도 된 거야?

선예   그런 거 아냐.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러 왔어?

   아니. 내 그림 찾으러 왔어. 

선예   (그림을 막아선다.) 니 그림?

현   응. 내 그림. 

선예   어이가 없네. 

   내 손으로 그린 내 그림이야. 

선예   다른 그림 다 가져갔잖아. 왜 이거에 집착하는 거야?

   그러는 넌 왜 집착하는데?

선예   내 평생에 내가 원하는 뭘 가진 적이 있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 하나 가지고 싶다는 것뿐야.      

현, 그림 앞으로 걸어간다. 

사이     


선예   그만 가. 

현   싫어.  

선예   니 애인도 이거 가지고 오래? 

   응.

선예   양심도 없다.

   (선예를 슬쩍 보며) 얼굴 좋네. 오늘은 커피 몇 잔이나 마셨어?

선예   오늘은 안 마셨어. 그런 건 왜 묻는 거야?

현   넌 늘 커피로 각성되어 있거나 술에 취해있거나. 둘 중 하나였지.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서.

선예   술은 니가 마셨으면서 나한테 시비 걸러 온 거야?

   아니. 그림 찾으러. 

선예   그럼 그림 얘기만 해.      

  그림을 바라본다.


사이     


선예   니가 날 불안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거 알아.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색을 정확히 보고 싶었어. 똑같이 깨어 있는 것 같지만 정말 확실히 깨어 있어야 색이 정확히 보이거든. 그래서 난 늘 깨어 있어야 했어. 그래서 커피를 마셨고, 그림 작업이 끝난 뒤에는 그 그림이 내 것이 아니라 니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지. 그때 술을 마셨어. 

   니가 너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가 스케치부터 가르쳐준다고 했지만 니가 거부했잖아. 

선예   너와 협업하는 게 좋았어. 너와 나 사이의 끈을 가지고 싶었거든.

현   그거 알아? 우리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그 아이가 끈이 됐을 거야. 

선예   말도 안 돼. 그건 또 다른 생명일 뿐이야. 

   그림도 우리의 끈이 되진 않아. 

선예   그건 달라. 너랑 나를 조금씩 녹여서 만든 거니까. 

   난 예술을 위해 날 녹이지 않아. 

선예   (그림을 가리키며)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매번 매 순간 그림을 위해 날 녹여. 이게 내 삶의 이유거든. 

   삶을 위해 다른 길은 가보지도 않았잖아. 아이가 있었다면 달랐을 거야. 

선예   아직도 그 얘기야? 대체 언제까지 그 얘길 들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그린 그림 얘기만 하자. 

   자꾸 우리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선예   다 내 아이디어였어. 네가 평론가들에게 극찬받았던 것들은 다 내 감각에 대한 거였어.     


긴 사이     


   언제부턴가 나도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선예   지금 그리고 있잖아? 아무런 특별할 게 없는 그 고요함 그 평화. 그게 좋아?

   응. 

    

사이     


   난 니가 너무 힘들었어. 너의 그 어두운 내면을 견뎌야 했지. 아니. 일정 부분 난 그걸 나눠 가졌어. 

선예  ….

   왜 넌 행복을 못 느끼는 걸까. 

선예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야?

    맛있는 국수 한 그릇에도 금세 행복해지지. 난 그게 신기해. 

선예   잘됐네. 

   신기해.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오랫동안 무기력했었나 봐. 삶이 회복되는 느낌이야. 

선예   알았어. 니 말 무슨 말인지. 하지만 그림은 안 돼. 

현   왜 안 된다는 거야?

선예   이제 나가줘. 

   (그림을 막아선다.) 가져갈 거야. 

선예   잊었어? 우리 오늘 재판하고 왔어. 판결에 따라 가져가든 양보하든 해. 이런 억지 부리지 말고. 

현   억지 아냐. 니가 양보해줄 거라 생각해서 온 거야. 인간 대 인간으로 얘기해보려고. 

선예   너도 오늘 재판이 절대적으로 나에게 유리했던 걸 아는 거구나. 

  니가 비겁한 방법을 썼으니까. 넌 그림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한 게 아니야. 넌 그저 재산 분할을 적게 받는 수법으로 동정심을 얻었지. 재판부에서 인정해준다 해도 그건 재산으로 인정하는 거야. 그림에 대한 네 공을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고.  

선예  어떤 방법이면 어때. 

  대체 왜.

선예   너는 왜 그렇게 이 그림에 집착하는 거야?

    

현, 거실을 서성거린다.      


   나한테 왜 그랬어?

선예   뭐가?

   알잖아. 나에게 왜 그랬냐고?

선예   갑자기 그 얘긴 왜 또 하는 거야. 

  정신과에서 그러더라. 잊을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그 일을 직면하라고.  

선예   정신과 다녀?

현   오래됐어.      


사이 

현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응. 조금만 더 기다릴래? 얘기 중이야. 어떻게 그래. 기다려. 응. (끊는다.)     


선예의 카톡 메시지 오는 소리. 선예는 확인하지 않는다.

현, 불안한 듯 그림 앞을 서성거리다가 소파에 앉는다.      


현   요즘 생각을 많이 하거든. 그런데 알 것 같아. 니가 왜 그렇게 어두운 사람이 되었는지. 네 어린 시절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설명되진 않아. 그런 걸 극복하고 잘 사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 

선예  인정할게. 내가 부족한 사람이란 거.   

   넌 표현 욕구가 너무 많아. 그것을 빠져나가게 할 통로를 찾아야 해. 어떤 예술적 통로 같은 것 말야. 

선예  그게 미술이었어. 

  미술은 아니야. 나와 협업해야 했기 때문에 미술은 널 더 고통스럽게 했어. 다른 걸 찾아. 뭐든 말야.  

선예  그러고 싶지 않아.      


사이     


   너무 끔찍했어. 

선예   뭐가?

현   니가 죽어가는 새의 몸을 가를 때 말야. 

선예   아냐. 죽은 새였어. 

   숨이 붙어 있었어. 손에 쥐었을 때 못 느꼈어? 그 희미한 맥박 말야. 

선예   무슨 소리야. 체온은 남아 있었지만 분명 죽은 새였다고. 

   이젠 기억마저 왜곡하는 거야? 죽어가는 불쌍한 새였어.

선예   (혼란스럽다.)

   새를 가를 때 네 표정이 생각나…. 네가 우리 아이를 지웠을 때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선예   그만….

   근데 미치겠는 건 네가 만든 붉은색은 내 그림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단 사실이야.       


사이     


   제발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선예   내가 무슨 표정을 했다고 그래?

   그 만족감. 그림에 도움이 되면 니 삶이고 니 주위 사람이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그런 표정 말야. 

선예   자꾸 날 괴물 취급하지 마. 나도 고치고 싶어. 정확히 얘기해줘. 그렇게 추상적으로 얘기하지 말구.

  날 괴롭히는 뭔가가 있는데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어. (아주 조심스럽게 심호흡을 한다.) 그 파괴적인 웃음…. 

선예   ….

현   너는 너 자신마저 파괴하려 했지. 그것도 두 번이나.      


현, 일어나 다시 서성거린다. 사뭇 불안한 몸짓. 자세히 보면 떨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애써봐도 잊히지질 않아. 수조에 첨벙거리던 그 붉은 피. 하얗게 질려 있던 네 얼굴. 팔목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 무슨 정신이었는지 그런 너를 안고 뛰었지. 하필 그날 난 흰 셔츠를 입고 있었어. (눈을 질끈 감는다.) 

선예   ….

현   나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현, 심호흡을 한다.      


선예   괜찮아?

현   의사가 나에게 가르쳐줬어. 이 호흡법 말야.      


현, 전화가 울린다.      


현   어. 벌써 그렇게 됐어? 금방 끝나. (사이) 왜 안 되는데? 일단 끊어. (다소 신경질적으로) 금방 나갈게. 금방. 미안해. 그래.      


사이     


   저 사람. 너랑 합의하고 오래. 재판 너무 피곤하다고. 

선예   이런 식으로 나랑 계속 연결되는 게 싫겠지. 나라도 그럴 거야. 

   그래. 맞아. 아직 너한테 신경 많이 써.  

선예   그냥 그림 줘. 그럼 끝나. 

   포기가 안 돼. 

선예   대체 왜 포기가 안 되는거야? 다른 둥지 연작은 다 니가 가져갔잖아.    

   그래. 맞아. 근데 저건 포기가 안 돼.

선예   대체 왜?

   나도 모르겠어. 니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겁이 나.

선예   뭐가?

  니가 행복해지는 거.  

선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 풍경화 봤니? 풍경화에 붉은색이 없어. 두 번 다시 쓸 수 없는 색이 되어버렸거든. 너 때문에.      


사이     


   니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사이     


선예   뭔데?

   그림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색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니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거 알아. 근데 말야. 이 그림엔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내 창조력이 들어 있어. 

선예   (비웃는다.) 창조력? 

현   니가 하라는 대로 한 건 온전히 너를 담고 싶어서야. 넌 절대로 이렇게 그릴 수 없을거야. 난 널 사랑했는데 넌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거든.       


선예, 감정이 요동친다.       


   우리 같이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 갔던 날 기억나?

선예   응. 

   그림 속 한 여자가 나체로 침대에 앉아 있었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그 여자가 널 닮았더라. 좁은 세상이 너무 답답하다는 듯 곧 그 창으로 뛰어들 것 같았어.  

선예  ….

   그건 너였어. 

선예   …

   언젠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걸 알면서도 니 옆에 있었어. 니가 삶을 사랑할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어. 근데 결국 넌 뛰어내렸어.      


사이  

   

   (그림 곁으로 다가가 그림 속 여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그러더라. 그림 속의 여자가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하다고.   

  

현의 전화가 울린다. 현, 받지 않는다.      


  너를 용서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현,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그림에 불을 붙인다.      


선예   뭐 하는 거야!

  내가 이 그림을 가지려는 이유 알고 싶어? 태우고 싶었어. 이걸 태우면 너한테 화가 좀 풀릴 것 같았거든.  

변호사(목소리)   (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죠! 냄새가!     


선예, 비명을 지르며 싱크대에서 컵에 물을 담아 그림에 뿌리지만 불길은 순식간에 그림을 태운다.      


   니가 괴로웠으면 좋겠어.      


현, 그림이 소강되는 것을 다 보고 문을 열고 나간다. 선예 주저앉는다. 변호사 들어온다.      


변호사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디 다쳤어요?

선예   아뇨… 아뇨… 괜찮아요….

변호사   경찰을 불러야겠어요. 

선예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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