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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아 Nov 04. 2023

붉은 여인의 초상(9)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8장


신문사 문화부      

대호, 감기에 걸렸다.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훌쩍거린다. 

열도 나는지 컨디션이 좋지 않다.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다. 

부장, 불만 섞인 표정으로 대호를 바라본다.      


부장   이 기자. 이게 뭐야?

대호   (코를 풀며) 기사입니다. 

부장   아니 누가 그걸 몰라? 기사가 평론 같아. 왜 이렇게 어렵게 썼어?

대호   평론 아닌데요. 평론은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데요. 인용도 많이 들어가고. 

부장   (혀를 차며) 잘난 척은. 여튼 이거 다시 써.   

   

부장, 원고를 대호 책상으로 집어 던진다. 그중 몇 장은 대호의 얼굴에 맞는다.      


대호   (원고를 쓸어 다시 부장에게 가져다준다.)

부장   뭐하는 건가?

대호   다시 안 씁니다. 이대로 나갑니다. 

부장   뭐라고?

대호   저는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부장   아니 내가 김현 작가 사생활 취재 좀 해서 재밌게 버무려보라고 했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철학적인 얘기를 쓰라고 했어?

대호   미술은 미술로 감상을 하셔야죠. 

부장   아니 누가 그걸 몰라? 그렇게 치면 자네 기사도 미술에 대한 얘긴 별로 없고. 이 뭐 쓸데없는 소리만 씨부려놨는데 말이야. 

대호   쓸데없는 소리 아닌데요. 

부장   이딴 식으로 개길 거야? 부장한테?

대호   네. 

부장   뭐?

대호   개길 겁니다. 

부장   지금 뭐 하자는 건가? 회사 그만두고 싶어?

대호   네. 

부장   뭐?

대호   근데 안 그만둡니다. 

부장   이 기자 오늘 왜 이래 무섭게?

대호   더 이상 부장님 소모품으로 안 살고 싶거든요. 

부장   뭐라고?     


대호, 나간다.      


부장   이거 봐, 이 기자! 이 기자! (사이) 어디가! 진짜 그만두는 거 아니지?

대호   화장실 갔다 올 겁니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같은 장소.      

혼자 야근하는 대호, 휴대폰으로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튼다. 

음향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원고를 읽는다.     

 

대호   김현 작가가 최근 그리고 있는 풍경화는 기계의 영역처럼 반듯하고 색이 화사하다. 물감을 배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정돈된 색채가 색색마다 대조를 이루며 우리의 눈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편안한 마을이 있고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으며 동물은 그들의 곁에서 아무런 경계심 없이 걸어 다닌다. 김현의 풍경화는 컴퓨터가 그릴 수 있는 그림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김현 작가가 기존 인물화에서 가지고 있던 특유의 위트나 도발적인 아이러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의 행보에 큰 우려를 낳는다. 최근 미국의 대형 미술전에서 AI가 그린 그림이 당선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예술 분야에서도 경쟁하는 시대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현의 그림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성을 내보이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로 자리하고 있는 김현의 그림이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다면 대한민국 미술에도 위기가 닥친 것은 아닐까.       


대호의 카톡이 온다. 대호, 메시지를 보고 놀란다. 

음악을 끄고 일어나 가방을 급히 챙긴다. 사무실의 불을 끈다. 

무대 밖으로 나간다. 빈 무대 잠시 보여진다. 

무대 앞쪽으로 신문사 로비에 조명 인. 선예가 찾아왔다.      


대호   갑자기 연락 와서 놀랐습니다. 마침 오늘 퇴근이 늦었는데 어떻게 아시고. 

선예   마감이 임박한 것 같아 그냥 도박해봤어요. 제가 맞았네요.  

대호   어디로 자리 옮길까요?

선예   아니에요. 여기서요. 잠깐이면 돼요. 

대호   그래도 이렇게 서서 얘기할 순 없으니. 잠깐 여기라도. (로비의 간이 의자를 가리킨다.)

선예   (의자에 앉는다.)

대호   자판기에서 음료라도 뽑아 드릴까요?

선예   아니예요.      


사이     


대호   하실 얘기라는 게?

선예   현이가 모르는 걸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대호   그게 뭔가요?

선예   기사로 써주셨음 해서. 

대호   두 분에 대한 건가요? 

선예   아뇨. 그림에 대한 거예요. 붉은 여인의 초상이요. 

대호   (수첩을 꺼내고) 뭐죠?

선예   제가 그 그림을 가지려고 했던 진짜 이유는, 그 그림이 현이의 그림 중에 유일하게 미완성이기 때문이에요. 

대호   미완성이요?

선예   네. 마무리를 짓지 못했어요.

대호   뉴욕 전시회 출품작이고 평가도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완성이라는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선예   오랫동안 현이는 정체됐었어요. 전 현이를 나아가게 도왔죠. 근데 그 그림을 그릴 때쯤 현이는 하나의 틀을 깼어요. 성숙함, 기술적 단련, 그리고 인물에 대한 이해까지 모든 게 충만해서, 그 그림 속의 인물은 나였지만 사실 내가 아니었어요. 나를 넘어선 그 무언가였어요. 그건 상상력이 아니라 창조력이었어요. 현이의 그림에 내가 들어갈 곳이 없었어요.

대호   그럼 그 그림은 임선예 님의 도움 없이 그린 건가요?

선예   네. 어쩜 그 그림을 혼자 그렸다는 걸 본인은 모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조언 따윈 필요 없이 그 앤 날아올랐어요. 매일 무섭게 매달렸죠. 그림은 하루하루 완벽해져 갔어요. 하지만 어떤 일 때문에 그림을 완성시키진 못했죠. 

대호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일이라는 게 뭔가요?

선예   전 현이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손목을 그었어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내 피를 희석시켰어요. 현이는 제가 저를 파괴했다고 하는데 전 사실 현이를 파괴하고 싶었던 거예요. 전 알았어요. 진짜 죽기 위해서는 내가 한 것보다 동맥을 더 깊게 그어야 한다는 걸요. 

대호   왜….

선예   현이의 정신을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대호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선예   나 없이도 완전해진 현이가… 떠날까 봐 두려웠어요. 

대호   떠나다뇨?

선예   사람이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이유는 그 존재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불완전을 채우려고요. 현이도 나에게서 그것을 채우려 했던 것이구요. (동의를 구하려는 듯 대호를 본다.)

대호   (이해가 가지 않는) 네? 

선예   현이는 생각보다 더 처절하게 파괴됐어요. 한동안 그림을 아예 그리지 못했고 지금도 붉은색을 쓰지 못해요.

대호   (일어난다.) 정말이지… 너무 끔찍하군요. 

선예   현이를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면 미친 사람 같나요. 전 얼마 전까지도 현이가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근데요. 아니더라구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끝내 채워 넣지 못한 그 그림의 빈틈들이 어쩜 그림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고요.  

대호   그림의 빈틈이라는 게 뭔가요?

선예   비교하자면 눈썹 없는 모나리자 같은 거요. 난 바보같이 현이를 망가트리고 그림을 방해했는데. 이상한 건 결과적으로 더 완벽한 여인이 탄생했다는 거예요. 그건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그림이었어요.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해 보이는 신비로움을 보았어요. 우리 사람처럼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는 존재요… (눈물이 흐른다. 그것을 닦는다.) 어, 미안해요.       


대호, 선예를 말없이 바라본다. 

한동안 침묵     


대호   (혼란스럽다.) 죄송하지만 마감 때문에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예   기사로 써주실 건가요?

대호   글쎄요. 뭘 써달라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선예   붉은 여인의 초상에 대해서요…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그 그림을 한 번만 언급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림이 세상에서 이대로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요.       


대호, 얼이 빠진 듯 아무 대답 없이 나가다가 뒤돌아     


대호   그런데요. 사람이 사람의 곁을 지키는 이유는 불완전을 채우기 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예   그럼요?

대호   나 자신이 완전해야 상대를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완전하다는 것은 누가 평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눈썹 없는 모나리자는 당당하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외람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대호, 나간다. 선예 혼자 남겨져 한동안 관객석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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