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작
9장
한강
현서와 대호가 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각자 손에 빨대가 끼워진 팩 소주를 하나씩 들고 있다.
대호 촛불을 켜놓은 것 같지 않니.
현서 상우랑 맨날 나 갖고 놀리더니 오늘은 니가 퍽 공감각적이다?
대호 현서야. 나 오늘 우리 부장한테 개겼다.
현서 뭐? 그 개부장?
대호 응 그 개부장. 사표 쓸 각오로 개겼어. 그 인간 평소랑 똑같았는데 갑자기 가슴팍에서 뭐가 욱하고 올라오더라고.
현서 너 더 괴롭히면 어쩌려고.
대호 모르겠어.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거든. 나 그냥 확 사표 낼까?
현서 응, 까짓것 확 그만둬버려. 니가 뭐 아쉬울 게 있냐. 있나? 아니. 좀 많이 아쉬운가?
대호 버텨야지. 내가 이 애매한 커리어에 어디가서 재취업을 하냐.
현서 그래. 버텨라. 버텨. 누군 뭐 가슴팍에서 뭐가 욱하고 안 올라오는 줄 아냐. 그 뜨거운 불덩이를 매일 냉수 먹고 진화시키는 거지.
사이
현서 나 경찰 공무원 준비할 때 공부하다가 진짜 답답하면 꼭 여길 왔거든.
대호 맞다.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한번 떨어지고 두 번째 도전할 때. 그때 너 엄청 예민했는데.
현서 연극반 시절 생각나지?
대호 흑역사지.
현서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았어.
대호 맞아. 세상만사 걱정 없고.
현서 1학년 때 우리 동아리 첫 엠티 갔을 때 니가 요리했잖아.
대호 그랬나.
현서 니가 요리에는 자신 있다고 막 잘난 척하면서 부추전이랑 계란찜 했지. 동기들은 고기 굽고 선배들은 찌개 끓이고.
대호 야. 너 기억력 되게 좋다.
현서 니가 만든 부추전은 속에 밀가루가 안 익어서 축축했고 계란찜은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소금 소태라고 선배들이 너 막 구박했었는데.
대호 하나도 기억 안 나.
현서 니가 만든 거 아무도 안 먹고 너는 미안해하고. 선배들이 벌주로 너 막 소주 먹이고 그랬었어. 근데 말야. 그때 딱 한 명 니가 만든 거 맛있게 먹었는데 기억나냐?
대호 야. 요리한 것도 기억 안 난다니까. (사이) 그게 누군데?
현서 나!
대호 진짜?
현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
대호 왜?
현서 니가 만든 거라서.
현서, 대호를 말없이 쳐다본다.
어색한 침묵
현서 나 말야.
대호 응?
현서 상우 만나보려고.
대호 뭐?
현서 상우
대호 만나본다니?
현서 사귀어본다고.
대호 뭐?
현서 놀랐냐?
대호 그럼 안 놀라냐. 둘이… (숨을 들이쉬고) 근데 왜?
현서 사귀는 데 이유가 있어? (사이) 상우가 나 좋아한대. 좀 됐대.
대호 몰랐어. 전혀.
사이
현서 얼마 전 니가 경찰서로 날 찾아왔을 때 나 너무 설레고 좋았거든. 근데 니가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날 찾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처음으로 내 자신이 가엾단 생각을 했어.
대호 현서야….
현서 나 상우랑 진짜 잘해보려고.
대호 그런 이유라면. 그건 아니잖아.
현서 있지. 그 여자. 왜 죽었는지 알아?
대호 그 여자?
현서 그 붉은 블라우스의 여자 말야.
대호 왜 죽었는데?
현서 중국에 같이 살던 남자가 있었대. 빚이 너무 많은데 여자가 빚 갚아주면서 살았나 봐. 힘들게 힘들게 일하면서. 남자는 도박까지 손대고, 여자는 허드렛일하고. 그러다 애를 낳았는데 애가 죽었나 봐. 여자가 반쯤 미쳐서 도망쳤대. 결국 한국까지 온 거야. 근데 그 남자가 쫓아왔대.
대호 죽였어?
현서 아니. 다시 합쳤대. 그리고.
대호 그리고?
현서 동반 자살.
긴 침묵
현서 무섭지 않냐.
대호 뭐가?
현서 그런 감정….
대호 그럼 감정?
현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그 감정 말야.
사이
현서 강력계에 있으니까 이런 평범하지 않은 것만 보고 살잖냐. 평범한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겠더라고. 상우 재밌고 착하잖아. 그냥 이렇게 친구처럼 계속 같이. 지금처럼 살면서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영화도 같이 보고. 딱 거기까지만 같이해도 행복할 것 같아.
대호 (현서를 바라본다.)
현서 그리고 너 때문에 다시 힘들고 싶지 않아.
사이
대호 그 여자 말야. 신기루였어. 신기루라는 게 결국 내 환각이잖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안 찾기로 했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건 너야.
사이
현서 (대호를 보지 않은 채) 예쁘다. 야경. 다시 보니까 진짜 촛불 켜놓은 것 같네.
대호 (현서를 빤히 바라본다.)
현서 안주 없는 팩 소주. 야 이거 괜찮다. (소주를 쭉쭉 빨아 먹고 빈 팩을 대호의 손에 쥐어준다.) 잘 마셨다. 친구야.
현서, 비틀거리며 무대에서 나간다.
대호, 혼자 남겨진다.
야경을 비추는 강물이 쓸쓸하게 흐른다.
무대 어두워진다.
무대 한쪽에 조명이 들어온다.
현이 돋보기를 끼고 종이 신문을 들여다본다.
현 신을 믿는 습성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가 완벽을 평가하는 기준은 너무나 높아 그것이 삶 너머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불완전함을 스스로 깨달은 인간은 완벽함에 대한 갈증으로 예술을 구현해왔고 현대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한 기술적 존재에게 예술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이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가설을 내려본다. 오류값을 걸러내는 컴퓨터와는 달리 인간이 입력하는 사랑이라는 오류값은 엉뚱하게도 예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사를 쓰는 이유는 김현의 인물화와 풍경화의 가치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김현이 인물화 그리기를 중단한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다. 김현의 인물화와 풍경화 사이, 그곳에 인간만이 재현할 수 있는 완벽한 미완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대호 기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