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을 다녀오며 -
삼 개월 만에 오라는 병원을 사 개월 만에 갔다. 대구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라 여겨지기에 조금이라도 늦추어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이고 싶기 때문이다. 가기 며칠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차 시간을 검색하고 예약하고 일어날 시간을 맞춘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진 결과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 지난 4년 여를 삼 개월, 육 개월마다 다녔지만 마음 편히 간 적은 없었다. 혈액 검사를 하고 결과 수치에 따라 돌아오는 발걸음이 달라진다.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전할 문자를 보낼 때의 표현이 달라진다.
암 환자치고 이렇게 수월하게 4년을 넘기는 행운에 감사하다. 첫 진단부터 지금까지 혈액검사만 받고 있으니 말이다.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이 가지는 특성인가 보다. 예후를 보다가 항암을 한다는데 그 시기를 늦추고자 식단관리, 운동 등의 섭생에 신경 쓴다. 아직까지는 잘하고 있으니 큰 변화는 없나 보다. 수치는 나빠졌다, 좋아졌다를 반복한다.
진료시간 두 시간 전에 채혈실에 가서 채혈을 한다. 암병동의 지하 2층에 내려가서 늘 먹던 전복죽을 먹는다. 나 같이 진료를 앞두고 기다리거나 진료가 끝나 금식의 허기를 달래려는 사람과 환자를 챙기는 가족들도 보인다. 간혹 간호사도 보이고 젊은이는 노트북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이곳에 있다. 늘 사람이 많은 편에 비해 덜 시끌벅적하다. 가슴에 덩이를 안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카페에 앉아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 천천히 조금씩 죽을 먹는다. 즐겨보던 유튜브 '이교수의 책과 사람'을 틀어 놓고. 전복죽은 시중에 파는 맛과 비슷한 걸 보니 사다가 데워서 주는 것 같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맛없는 것도 아닌 걸로 봐서는. 하지만 사람이 자꾸 들어오는데 빈 그릇을 앞에 두고 버티고 앉아 있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가방을 챙기고 일어난다. 진료실 앞 소파에 파 묻혀 시간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유독 길게 느껴질까. 결코 있고 싶지 않은 장소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아야 하는 냉엄한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다 보니 1층에 상담실이 보인다. 편안해 보이는 분위기에 이끌려 들어가 보니 책꽂이에 가득 꽂힌 책들이 보인다. 잘 됐다. 읽던 책을 가방에 넣었다가 출발 직전에 빼버렸다. 가고 오는 먼 길에 책의 무게가 주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피곤한 걸 무서워하는 나는 어딜 가나 고려해야 하는 것이 가방의 무게다.
안내하는 분이 얼굴에 한가득 미소로 맞아준다. 뽀얀 얼굴과 가지런한 치아가 정감을 더 느끼게 해 주나 보다. 내가 물었다. "상담은 받지 않고 책만 읽으면서 쉬어도 괜찮을까요?" 더욱 환하게 웃어주며 '물론이지요'"라고 답해 준다. 서가에 꽂힌 책을 눈으로 훑으면서 '음, 괜찮은 책들이 있네.' 했다. 그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시구로 카즈오의 [녹턴]을 뽑았다. 녹턴은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책이 얇아서 바로 나에게 간택되었다.
책을 보고 있을 때 안내하는 분이 먼저 자리부터 잡으라고 눈짓을 해 주었다. 어딜 가도 먼저 앉혀지는 자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그런 곳이었다. 눈치를 채고 가방으로 내 자리를 확보한 다음에 책들을 보다가 책을 집었다. 그분이 내 곁에 다가와 어떤 책을 골랐느냐고 물어주었다. 사람은 참 작은 것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그분의 질문이, 삭막한 서울의 어느 병원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느낌인 나에게 온기로 다가온 것이다. 그분 쪽으로 책을 내밀며 겉표지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읽고 싶어지는 책이네요"했더니 동의한다고 해 주었다. 미소로 배웅받으며 자리에 가서 편안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에 막 빠져드는 즈음에 종이컵에 든 차 한잔이 내 테이블에 조용히 놓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안내해 주시는 그분이다. 미소로 답하고 차를 마셨다. 얼마나 따뜻한지! 이런 마음을 건넬 수 있는 저분은 어떤 분일까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진료 시간에 맞추어 책을 꽂으러 갔을 때는 다른 분이 앉아 계셨다. 왠지 섭섭했다. 그녀가 보내줄 따뜻한 눈빛을 받을 수 없어서겠지?
진료를 마치고 그만그만하다는 소식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가을이 겨울로 접어들어 오후의 날씨는 쌀쌀했다. 하지만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 빨갛고 노랗게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