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J형 인간이다. 언제나 무언갈 미리 계획한다. 새해가 되면 올 해 하고싶은 일을 정리한다. 어떤 일의 마감 1주일 전에 내 마음의 마감을 따로 정해놓고 그 전에 일을 끝낸다. 구체적이진 않아도 몇년 후의 생활까지 생각하는게 자연스럽다. 가족이나 친구와 여행갈 때도 같이 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른 시기에 비행기라던가 숙소 같은걸 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은 "어떻게든 되겠지" 이다. 그 "어떻게든 된다"이란 것은 돈이든 시간이든 노동력이든 더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계획형 사람들은 통제욕구가 크다고 한다. 자신이 생각한대로 삶이 흘러가길 바라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미리 통제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이라고. 늘 내 뜻대로 무엇인가를 하며 살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산다는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살면서 계획대로 되기도 안되기도, 기쁠때도 정말이지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느낀 것은 해외살이를 준비할 때였다. 2022년 6월 출국이 2021년 10월에 확정되었다. 제일 중요한 '집' 관련해서, 한국의 집은 출국이 확정되기도 전 여름에 미리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런데 지난 몇년간 폭등하는 집값에 집의 거래량도 무척 많았는데, 내가 집을 내놓은 시기부터 금리 인상이며 각종 규제, 집값 하락에의 염원으로 거래가 뚝 끊겼다. 집보러 오는 사람이 한달에 한번 올까 말까였다. 집이 팔리지 않으면 계획해둔 생활금이 부족해지는데 집을 팔지 못하고 나왔다. 무려 1년 전부터 내놓은 집이였는데.
외국에서 살 집은? 학교 가족기숙사를 입학이 확정되자 마자 10월에 바로 신청했다. 8개월 전에. 대기번호가 뒤였지만 겨울학기 겨울과 봄학기를 지나면 충분히 빠질 수 있는 번호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 2년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코시국으로 인해 유학을 중단했거나, 유학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들이 2022년에 한꺼번에 몰렸다. 중국자본으로 밴쿠버의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곳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나는 지난 6개월 간 밴쿠버에서 이사를 전전하며 3곳의 집에 살았다. 100만원 중반을 예상했던 월세는 200만원 중반이 되었다.
짐은? 한국집에 있는 짐을 배를 통해 밴쿠버에 미리 보냈다. 2~3달이 걸린다기에 4월에 한국에서 2달간은 쓰지 않을 짐들, 이불의 반, 옷의 반 등 챙겨 6월에 정착할 때 편히 쓰려고 했다. 그런데 살 곳이 정해지지 않아 미리 보낸 몇박스의 커다란 짐은 그야말로 짐이 되었다.
밴쿠버 도착한 바로 다음날 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고 카드를 신청했다. 정착 초기엔 돈 쓸 일이 무척 많아 신용카드가 필요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두달이 지나서도 카드를 받지 못했다. 원래도 밴쿠버는 무엇이든 느리다기에 한달을 기다리다 이상하다 여겼는데 우편물로 배송온 카드가 도난 당했다고 경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차는? 한국에서부터 밴쿠버 중고차 딜러 게시물을 확인하며 준비했다. 그런데 반도체 수급 문제로 신차 출고가 1년후 2년 후로 미뤄져 중고차 매물의 씨가 말랐다.
나는 모든 것을 미리 부지런히 준비했다. 출국 전에 양가 가족들도 만나뵙고 인사드리고 친구들도 만나며 주말 내내 바빴고, 주중에는 한국 생활의 정리와 밴쿠버 생활의 준비를 위해 애썼다. 회사 사람들과도 여러 그룹 별로 자주 만났다. 앞으로의 생활을 내 뜻대로 '잘' 하고 싶어서 나는 거의 1년을 무척이나 무리했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미리 준비한대로 된것은 하나도 없었다. 위에 적은 큰일 말고도 해야할 일은 아주 많았는데 밴쿠버의 4시까지만 일하는 문화, 자연과 함께 느긋해진 사람들의 성격 덕분인지 운이 없었는지 많은 것이 계획과 어긋났다.
나는 계획형인간으로 사는 것이 대체로 좋았지만, 아주 큰 단점이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의 큰 걱정과 불안이다. 10개 중 1, 2개가 계획대로 안되는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10 중 8,9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나는 스트레스와 불안, 체력저하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모든 계획과 계획의 틀어짐을 타국에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겪어내야 했다.
이 때의 나를 지탱해준 것은 INTP 인간 남편이다. 8년 간 그와 지내며 자주 "어떻게든 되겠지 뭐" 라고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시기에 어떤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어떻게든 된다" 하며 "다 별일 아니야.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라며 담담히 다른 해결책을 찾는 남편 덕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단기간에 큰 환경 변화 속에서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겪으며, 늘 '어떻게든 되는 것'을 보며 마음을 점점 내려놓게 되었다. 여행을 가서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그게 당연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갖 변수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내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는게 더 이상한 일이라는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자 늘 계획과 걱정으로 생각이 끊이지 않던 머릿속이 자주 잠잠해졌다.
어렴풋이 내 마음이 계획과 통제욕구, 불안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참에, 책을 읽다가 너무나도 깜짝 놀랐다. 스님이 나의 얘기를 1대 1로 듣고 가르침을 주는 것인줄 알정도로. 그 페이지를 옮겨 적는다. 나와 같은 J형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어떻게 하면 삶이 펼쳐지는 데 잘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미래의 계획과 통제와 조직에 덜 신경 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면 됩니다. 완전한 몰입에 빠졌을 때의 기분을 아실 겁니다. 기민하게 주의를 집중하게 되지요. 알아차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겁니다.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은 닥치지도 않은 온갖 일에 대응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숙고하지 않습니다. 원하는대로 상황이 흘러갈지를 끊임 없이 걱정하지도 않지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히 대응합니다. 더 현명한 방법이지요.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당면한 상황을 의식하려면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상당히 벅찬 일입니다. 인간은 본래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이지요. 앞날을 알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면서 행동 또한 경직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엄청난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면서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척 합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과 예상에 집착하고 필사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지요. 물론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삶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이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지, 계획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모두 진한 잉크 대신 흐릿한 연필로 일정표와 계획표를 쓴다고 상상해봅시다. 앞으로 벌어질 거라고 우리가 기록하거나 생각한 일이 실제론 벌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 점을 늘 염두에 두며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면 어떤 삶이 시작될까요?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자연의 속성입니다.
사원 생활은 삶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타고난 의지를 좌절시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만지지도 못했고, 언제 무엇을 먹을지 또 누구와 살고 어느 오두막에서 잘지 선택하지도 못했습니다. 승려가 되면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선택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수행은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줍니다. 삶이 불확실해 질 때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앞날을 모를 때도 내면의 평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노력을 덜 기울이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덜 집착하고, 삶이 실제로 벌어지는 유일한 장소인 지금 여기에 더 마음을 여는 과정입니다.
실은 누구나 인간의 삶에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잘 알 것입니다. 이승에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희망, 두려움, 가정, 소망, 예상, 의도 등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저도 모르게 꾹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리고, 펼친 손은 삶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