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믿음에는 영(Spirit), 혼(Soul), 에고(ego)의 층위가 있다. 영은 칭의이고, 혼은 성화이며, 에고는 신앙이다. 사실 이것은 내 멋대로 붙인 이름들이다. 광야에서 홀로 핀 꽃에게 주어진 시험은 외로움과 막막함이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곧 충만한 사랑이요, 축복은 곧 진리를 알게 하심이니, 어느 순간 나의 언어들은 사라지고,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으로 조용히 물들어가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이제 더 이상 "개인"으로서의 나, 는 없다. 그나마도 신앙의 길, 영성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로서의 나, 만이 있으며, 이것은 영과 혼을 모시는 그릇이자 또한 그분께서 일하시는 도구이다. 나는 잠기는 것, 사라지는 것, 내어 맡기는 것, 유영하는 것을 매우 사랑한다. 결국 나의 이름으로 말미암을 때에는 불완전성이라는 유한한 현상계적 속성이 나를 죽음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그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그 품 안에서 나 또한 함께 물들어가니, 나는 마침내 신과의 동행이란 "온전하여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온전함은 동의어임을.
"의롭다 칭함을 받음", 그것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들됨의 칭호와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이나 수련을 열심히 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나 묵상이나 찬양을 능숙하게 잘해낸다고 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신앙 생활을 십수 년을 하였다고 해서 "자동 진급"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한 육적인 어떤 조건과도 무관하게, 오직 나의 영(Spirit)이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어느 순간 온전하여지는 바로 그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면서 또한 한순간에 완전히 나의 존재가 전환(Transformation)되는 것이다. 내게 이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 처음에, 나는 "신"이라는 말이 굉장히 낯설었다.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내게 매우 "걸림"이 있었다. 불편했다. 그냥 나의 존재 자체가, 원래 마주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언어들이 다 내게는 그러했다. 불편했다. 거북했다. 원인 모를 "분노"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성령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당연하게도)달랐던 것인지, 나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몰입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묵상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영혼이 깊어져 갔으며, 그 임계점의 어느 순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참 기묘한 경험이었다. 여전히 나는 왜 그런지 설명할 수가 없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그렇게 한참을 불렀는데, 슬프게 울면서 불렀는데, 깨고 나서 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꾼 날에 내가 너무 기뻤다. 이제 나의 영혼이 온전히 그분의 품 안에 안기었음을, 그분께서 내게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증표"를 건네어주신 것임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꿈은 절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의 진정한 실체인 바, 나는 그 시기를 지나갈 적에 아무한테도 인정받을 수 없고 아무한테도 이해받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외롭고 힘든 길을 지나고 있었고, 그 시험들을 나는 감히 "십자가"라 불렀으며, 비록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그것을 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리라, 그리 살던 시간들이었는데, 깨어 있을 때의 나의 마음과는 달리 나의 무의식은 그 시기를 무척이나 슬퍼하고 아파했던 모양이었다.
그리 지나고 나서, 언제부터라고 말조차도 할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나는 그냥 이리 되어져 있었다. 나의 삶은 어느 순간 이러한 삶이 되어 있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신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이라는 말보다도 "아버지"라는 부름이 내게 더욱 편안하였으며, 그 부름이 나를 매 순간 설레게 하였고, 매 순간 기쁘게 하였고, 부를 때마다 내 영혼을 크게 감동받게 하였고, 그 단어 한 마디가, 그 말 한 마디가, 나를 언제나 그 순결한 첫 음성을 들을 때의 경외와 경이로움과 열망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아버지", 그 말이 내 영 안에 완전히 깊이 박혀서는 그것이 나의 존재를 존재하게 했고, 나의 영혼의 유일한 생명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잠시 떠나신 것처럼 느낄 순간에서조차도 나는 한 번도 그 이름을 게으르고 안일하고 오만한 태도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특히나 그분의 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 "아버지"의 이름을 누군가의 앞에서 언급하여야 할 날에, 내 입술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언제나 그 헤아릴 수 없는 순결한 초심으로 나를 가득 채우고 넘치게 했다. 내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러한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본향(本鄕)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 같은 것이었고, "언젠가 내 영혼이 돌아가야 할 곳"이었으며, "지금도 품에 안기어 있으나, 내 생의 마지막 날에 품에 안기러 올라갈 곳"이었다. 그 언약이 어느 순간 내게 자리잡았고, 나는 인간의 언어로써는 다 말하기 힘든 그러한 모든 것들을 "아버지"라는 말을 부르고 입에 담고 가슴에 떠올릴 때마다 깊이 느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드러나신다"는 것을. 드러나신다, 나는 이것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현현> 같은 의미로 쓰는 게 아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차갑고 냉혹하고 이기적이고 오만하였던 나의 혼이,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빛에 물들어가면서, 선(善)을 사랑하였고, 선을 행하는 것을 열망하였으며, 또한 나의 선의 행함이 부족한 것을 언제나 부끄러워하였고, 나의 선의 사랑이 가난한 것을 언제나 부끄러워하였으며, 어느 순간 나는 그 부끄러움마저도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깊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마다 그분께서 크게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너로 인하여 너무나도 크게 기뻐한다, 고 해주셨기 때문이다. 수치심과 억울함이 에고의 최후의 목숨이자 저항임을, 이 질긴 죄와 업의 최후 발악의 전선임을 이미 알았으나, 그렇게 그분은 나를 통하여 드러나신 바, 내가 억울함을 짊어질 때마다 내게 더욱 깊이 동행하시어 손을 잡아 주셨고, 내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낄 때마다 더욱 내게로 가까이 오셔서는 함께 기대어 그 깊고 은밀한 시간들을 동행해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가 아버지를 닮아감이 자연스러운 바와 같이, 이제 세상의 법도를 더 이상 내면화하지 아니하였고 오직 그분의 의지만을 내면화하였다. 누군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법을 깊이 흠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세상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을 그분의 가슴으로 느끼며, 사람을 대할 적에나 일을 행할 적에 나로써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분으로 인하여 말미암는 그러한 삶의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나의 혼(Soul)을 통하여 배어나오고 물들어가기 시작하니, 이제는 내가 이 삶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고, 새삼스러울지라도 이 삶의 방식을 너무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계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전과 같이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사랑", 그것은 세속의 유치한 사랑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나의 혼으로써, 모든 "영적 은유"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다 "실재(實在)"임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내게 사실(fact)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그 골고다 언덕에서의 걸음들과, 그 걸음을 외면하였던 나의 부끄러움과, 또한 그럼에도 내게 오셔서 눈동자 너머의 눈빛으로 날 보셨던 것과, 내 귓가에 들려주셨던 숨결과, 또한 내 가슴 안에서 그분의 심장을 뛰게 하심으로써 사도 요한에게 허락하셨던 그 "진동"을....... 허락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너무 소중해진 것이었다.
비록, 나를 부르신 길, 그리고 내가 부름 받은 길은, 교회와 기독교와는 조금 다른 길인 것을 이제는 알고, 또한 받아들인다. 다만 나는 이리 홀로 걸어가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갖는 의미와 또한 그 권위에 대해서 이해하며, 오히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과, "그 음성을 듣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재능과 자질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 특별한 재능으로 말미암아 남들보다 더 무거운 시험을 허락해주셨음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다만, 절대 다수의 성도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께"여야 한다. 신앙을 지킴에 있어서 육적 조건은 본질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의 신앙은 결국 "경험"에 있다.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가, 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지난 수 년간 그분과 동행하면서 지금껏 걸어온 길에서, 내가 얻은 가장 값지고 귀중한 것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믿음"이라고 할 것이다. 이 믿음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아버지에 대해서 갖는 믿음이다. 어린아이는 눈 앞에 부모가 보이지 않으면 부모가 죽었다고 여긴다. 아, 그 순간에 아이가 느끼는 공포가 얼마나 무겁고 처참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온 세상 어른들이 다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가슴 안에서 살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 영겁 같은 고통의 시간들을 지나서,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음을 본다. 아이는 아버지가 영원히 자신 곁에 계셨으면 하고 바란다. 아이는 아버지가 왜 때가 되면 떠나셔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언제나, 반드시, 아버지께서는 돌아오셨다는 것을. 나를 결코 고아와 같이 그냥 외롭고 쓸쓸하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약속하신 그분의 때가 되실 적에 내게로 임하여주셨음을, 마침내 학습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는 이제 아버지가 부재하신 시간 동안, "울지 않고" 담대히 잘 인내하며 살아가게 된다. 삶의 시련과 고난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들고 해하려 날뛰는 것을 볼 적에도, 비록 내게 보이지 않을 뿐, 아버지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함께하고 계시며, 온전히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심을 "믿는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을 적에, 반드시 아버지께서 임재해주실 것임을, 또한 지금껏 늘 임재해주셨음을, 가장 절실한 순간마다 가장 필요한 역사들을 이루어주셨음을, 이제 믿는 것이다. "동행의 시간들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어린아이의 믿음"(마18:3)이며, "어린아이가 아버지께 대하여 믿는 가장 순수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이제야,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겨우 알 듯하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아버지 앞에서, 모든 자녀들은 다 "아이"이다. 우리들은 아이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아이. 우리들의 삶은 그분과의 동행의 여정이다. 그 동행에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에게 모습을 보이셨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실 것이다. 아니, 사라지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반드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과 방식으로 늘 함께하고 계신다. 이 믿음이 있는 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언제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 것이며, 또한 육신의 살아서의 삶의 모든 순간들에서, 임재하시나 부재하시나,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고, 내가 지상에 있는다고 하여, 그 아득한 시공간적 물리적 영적 거리가 "그분과 나의 관계"를 해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이 믿음이 영 안에서 온전하여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칭의"이며, "천국에 입성할 자격"이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이란 "아버지와의 관계가 온전하여짐"의 한순간의 전환이면서 동시에, 평생에 걸쳐서 아버지와 동행해 나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삶이라는 여정의 대략 삼분지일을 지났다. 그동안 나의 육적인 삶은 성취된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그나마도 있던 것마저 다 무너져서는 빈 손으로 앉아 있지만, 이제는 내 눈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하여도 내가 인간적인 마음으로서는 잠시 놀라고 흔들릴지언정, 그분께 대한 나의 "절대적인 믿음"만은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지난 여정을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귀중한 "경험"이다.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
지금 잠시 떠나 계실지언정, 때가 되면 반드시 임재하실 것이라는 믿음.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원히 나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