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람으로써 얻고자 하는가
이 가난한 영혼이 감히 수행자들에게 권면하고자 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이익을 바라는 것, 무언가를 얻고자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욕구는 자연스럽다. 욕망이 뒤틀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수행에도 마찬가지이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그리고 한평생을 기도하는 삶으로 묵상하는 삶으로 사는데 있어서 그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보이는 것을 향하지 않음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랄 뿐이며, 또한 자신이 바라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허상이 아니요 실재임을 내가 믿는 그 마음 하나(히11:1)일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내가 단 한 순간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8:20) 하신 그 말씀을, "너희는 어찌하여 한 시간조차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40) 하신 그 말씀을,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우셨을 그분의 십자가를 감히 조심스레 가늠하고 마는 것이다. 매 순간이 시험이었고, 매번 바라던 것들이 무너졌으며, 뜻했던 것들이 좌절되었으며, 가장 소중했던 인연들은 떠나갔고, 그들이 매번 떠날 때마다 나를 단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였으며, 나는 그 가운데에서 결국 홀로 이리 남았다. 그 순간에 내게 남았던 것은 오직 그분 뿐이셨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들이, 외부인들이 보기에 그저 그런 크리스천의 관습적 기독교적 언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나의 심장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껏 숨 쉬고 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의 업은 무거우며, 나의 까르마는 지독하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 크리스천 형제들이 교회라는 온실 안에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신앙을 키워갈 적에, 나는 홀로 못생기고 가난한 나의 외롭고 쓸쓸한 신앙을 온실 바깥의 혹독한 광야 속에서 키워가야만 했기에, 나는 살기 위해서 그분을 찾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분을 찾았으며, 시험을 어떻게든 끝까지 통과하기 위하여 그분께 매달렸다. 그분의 발가락 끝이라도 붙잡고 매달렸다. 혼자서는 이 길을 절대 통과할 수 없음이 내게 너무나 자명하였기에.
결국, 나의 영성은 믿음이다. 믿음 하나다. 그 어떤 복잡하고 그럴듯하고 신학적이고 영성적인 논리들도 이론들도 깨달음들도 다 이제 필요 없어졌다. 결국, 믿음이다. 그 믿음이나 저 믿음이나 다를 바가 없다.
나는 말하고자 한다. 수행자들이 평생을 그 고통스러운 영적 성장의 길을 걸음으로써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결실은 무엇인가. 보상은 무엇인가. 그 보상은 육의 차원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형제들이여, 명심하라. 우리들이 이리 걸어가는데 대한 보상은 우리들이 살아 있을 적에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육의 죽음 이후에 주어질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살아서 적당히 돈도 벌고, 사랑도 하고, 명예도 얻고, 뜻을 이루고 성취하며 그리 살아갈진대, 우리들은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함으로써 매 순간 시련일 것이고 매 순간 고난의 연속일 것이다. 사람의 죄성은 곧 자기를 낮춤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이요, 자기를 낮춤은 곧 자기 안에서의 그분의 부활하심을 위한 예비이니, 그 예비는 곧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받을 보상은 두 가지이다. 첫째, 죽음의 순간에 고통 없이 편안한 것. 나는 이것을 농담 삼아서 가벼이 말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거창한 것을 바라기라도 하였는가? 번쩍번쩍하고 화려하고 그럴듯한 결실이라도 삶에서 성취되기를 바라였던가? 꿈을 깨야 한다. 우리들이 이리 고통스럽게 걸어감으로써 얻는 직접적인 보상은 단 하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그 죽음의 순간이 마치 한여름 밤에 서늘한 공기 가운데에서 편안히 잠들듯이 하는 그것뿐이다. 나는 이것을 진심으로 영접하였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영접하였다. 죽음이 편안한 것, 이것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까마득한 선업(善業)을 쌓아야만 한다. 악업을 쌓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선업을 무수히 많이 쌓아야만, 한평생을 선업을 쌓아야만,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나는 올해로 이제 서른을 갓 넘겼다. 서른 하나인가.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토록 어린 나이에 자신의 육의 젊음만을 믿고 오만하여야 할 적에, 죽음이 얼마나 무겁고도 절실한 문제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나이가 있는 독자분들은 지금의 내 말에 깊이 공감하실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죽음 이후에도 신의 품 안에 영원히 거할 거라는 약속, 곧 언약이다. 신을 믿는 자는 신의 품 안에 거할 것이요, 부처를 믿는 자는 부처 안에 거할 것이요, 진리를 추구하였던 자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이다. 뭐라고 부르든 간에 상관없다. 그러나 이 하나됨의 언약은 곧 한평생을 수행하고 기도하고 묵상하였던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의 약속이다. 이 하나로 족하지 않은가. 홀로 외롭게 선을 증거하고,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며, 내가 받을 축복마저도 다 나누어준 뒤, 가난한 주머니를 움켜쥐고서 슬픔과 외로움에 눈물흘릴 적에, 그분이 주신 이 언약 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이 이리 나아가기에 이미 충분치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은, 그 하나됨이 죽어서 주어지지 않고 또한 살아서의 평생에 함께할 것이라는 진실이다. 살아서 신을 사랑한 자는 신께서 그의 안에 거하실 것이요, 신과 매 순간 함께 숨쉬고 손잡고 걸을 것이며, 또한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됨의 언약은 곧 살아서 이미 성취된 것이며, 그 성취의 표증으로써,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홀로 외로이 담대히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매 순간 허락하실 터이니, 이는 집단성의 죄성에 지배당하는 인간 존재로써 불가능한 것을 우리 안에서 가능케 하심으로써, 그분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살아서의 매 순간을 신과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평화로울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신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는, 눈을 뜬 자들만이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