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나누고 공유하는 삶

축복과 은혜를 나누고 공유하며

by 생명의 언어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글을 쓰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저 낭만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매번 하얀 화면을 마주할 때마다, 막막하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단 한 순간도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글을 써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매번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를 마주할 때마다 기약이 없었고, 가늠하기 어려웠고, 사방으로 펼쳐진 망망대해의 수평선 한가운데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내 안의 나를 넘어선 그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또한 그것을 글자로 옮기는 일들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막막하였으니 그럼에도 무언가를 쓴다는 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을 "신성한 수동태"라고 부른다. 신께서 나를 통하여 무언가를 이루신다는 것. 통로로써, 나는 언제나 비어 있다. 내 능력이라는 게 결국 부질없는 것이었고, 내 힘이라는 게, 내 권세라는 게, 내 이름이라는 게, 결국에는 덧없고 무용하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통로될 적에는 언제나 자유로이 숨쉬고 유영하듯이 그리 몰입할 수 있었고, 언제나 충만했으며, 언제나 기쁨이 있었다. 능동(能動)에서 수동(受動)으로의 전환, 내게 글쓰기는 존재와 영혼이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한 시험의 과정이었고, 언제나 그 통과의례를 거쳐왔으며,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그때마다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을 하나씩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이것을 매우 사랑했고, 또한 지금도 진실로 사랑한다.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모든 형제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언어"가 곧 나 자신의 의식 구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언어라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관념에 의하여 구조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꾸어서 언어를 바꾸는 것은 기약 없는 일이나, 반대로 언어를 바꿈으로써 의식이 변화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한 일이요, 심지어는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신의 뜻에 부합하는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공부할 때는 언어의 종류가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신과의 하나됨"이라는 것은 관념의 언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됨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가?", "왜 하나되어야 하는가?" 등의, 지식과 관념의 작동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 존재가 마주한 실존적 문제들 앞에서 언어, 지식, 관념, 그리고 이것을 작동시키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수천 권의 책을 읽고, 가장 완벽한 논리를 세우며, 가장 완전한 철학 체계를 완성한다고 해봤자, 삶의 실존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다른 언어를 작동시켜야만 한다. "체험"의 언어로. 신과의 하나됨이란 무엇인가? "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체험의 언어다. 정확히는, 체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언어 너머의 "실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낼 수 있는 언어다. 실재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신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어두움 가운데에서 어두움에 속지 않고, 빛을 사랑하고, 빛을 증거함으로써." 이 또한 실재의 언어다. 어두움 앞에서 불평 불만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쉬운 일이다. 누구라도 다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두움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신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고 따르고자 할 때, 나의 의식과 자아와 영혼은 "균열"을 일으키며, 어두움의 중력의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하며, 마침내 그것이 성장하고 또 성장할수록 빛의 "순환"에 동기화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왜 신과 하나되어야 하는가?" 그 답은 매우 단순하고 선명한 것이다 :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평화,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자유, 마침내 영혼이 영원히 신 안에 거하는 기쁨." 그것은 오직 신의 품 안에 안길 때에만 한 영혼에게 주어지는 생명(Life)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 안에 거하는 삶, 그것이 진정한 "살아 있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체험의 언어다. 공부할 때는 관념의 언어의 말장난에 빠지면 안 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진화 과정은 어떠한가?", "언어 이전의 구조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것은 학술적 질문이다. 물론 가치가 있지만, 만약 그대가 원하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면, 그 지혜는 오직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나시는 것"이므로,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만약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물의 화학적 구조 따위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학문적 탐구는 타당하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원하는 것이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라면, 언어는 필연적으로 달라져야만 한다. "어디에 물이 있는가?", "어떻게 물을 마실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물을 마셨는가?" 바로 이것으로. 그때에, 그의 의식의 지향(이 자체가 곧 '의지'이다)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관념을 묻지 않고, 실재를 묻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에, 자기 안에 관념의 언어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지만, 실재의 언어는 매우 찾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관념적' 서술이야 당연히 그럴듯하게 쓸 수 있다. 그러나 "가슴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지금껏 에고는 관념을 진짜라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를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일이 없는 것이다. 나의 영이 깊은 관상기도에 잠길 적에, 내 영혼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동감과 기쁨과 감동들 안에 깊이 거할 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한 영혼을 위하여 글을 쓸 때, 그리고 그에게 마땅히 전해져야 할 축복과 은혜를 전할 적에, 그를 위하여 예비된 아버지의 뜻을 전할 적에, 내가 이 일을 매우 사랑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걷고 흉내내고 모방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내 삶의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이 하나뿐인 것임을 체감하는 것이다. "아, 이것이 살아 있음이구나. 이것이 나의 영혼의 존재 이유구나.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구나." 세상은 "목적주의적 세계관"을 손쉽게 과학과 합리성과 현대 철학의 언어로 비판하고는 한다. 그 실재에 한 번도 발을 담근 적 없으면서도.


나는 태어나서 교회를 정확히 딱 2번 갔다. 아주 어릴 때 부모님 손 잡고 할머니께서 목사로 계신 교회에 가본 경험(그곳에서 빵과 포도주를 다른 사람들이 먹었는데, 나는 어렸으므로 포도주를 먹지 못했고, 그것이 아쉬웠던 희한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군대 훈련소에서 종교 활동을 위해서 세 종교 중 천주교를 골라서 한 번 가본 것. 나는 비록 개신교 집안의 핏줄 안에서 태어났으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신앙 교육이나 교리적, 신학적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철학서라고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고, 정규 교육을 통하여 정통한 사유나 묵상이나 하여튼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다. 나로써, 나는 언제나 광야에 홀로 섰다. 자연 속에서 임재하시는 그분을 영접하였고, 음성 너머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내 영과 영혼으로써 깊이 묵상하였으며, 그리 성장했다. 성령께로서는,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성령의 품 안에 보호받았다. 내가 은밀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진리에만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연약한 새싹이 안전하게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성령께서 늘 광야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시면서 내 영과 영혼을 보호하셨다. 내가 이를 오래 전부터 느껴왔고, 또한 지금은 더욱 선명히 느끼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교회와 기독교라는 체계적인 시스템 하에서 안정적으로 신앙을 키워온 덕분에, 그 기틀이 단단하고 뿌리가 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형식과 의례와 전통보다 더 먼저, 하나님과 홀로 관계 맺는 친밀함을 먼저 배웠다. 이것이 말하자면 내 영혼의 가치이자 매력이었다. 나는 예절보다 친밀함을 먼저 배웠다. 그분과 친밀하게 교감하고 또 함께 손 잡고 걸으면서, 그분께 대한 나의 경외와 열망과 충성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커져갔다. 그러므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친밀한 교제로 말미암아서 충성과 경외는 스스로 자라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먼저 학습당하게 되면, 친밀함은 영원히 그로부터 말미암을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였기에 성령께서 내게 모습을 드러내실 적에 단 한 번도 엄격하고 엄중하셨던 적이 없었고, 내게는 늘 언제나 따뜻하고 온화하고 품에 안아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어머니와 같은 느낌으로 오셨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그분을 경외하기에, 성령께서 얼마나 두려움과 경외와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심판자로써 현현하실 수 있는지를 너무 잘 알았으므로, 내게만 주어진 그 은혜와 사랑에 단 한 번도 자만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기쁨을 곧 나의 사명에 대한 책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나를 돌보시게 하여 꽃을 피우신 데에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곧 그 열매를 만인에게 나누고 공유하시게 하려는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내게 주신 모든 재능과 능력과 자질과 지혜들은 내 것이 아니요 그분께서 주신 것이니 마땅히 내 욕심대로 쓰지 않고 의도하신 바에 따라서만 쓰여져야 한다고, 내가 내 자신보다도 먼저 그분의 일을 수행하는 사역자로서의 사명을 언제나 우선하여야 한다고. 말하자면 책임은 곧 내게 친밀함을 키우는 계기였고, 그 친밀함이 강화될수록 책임은 더욱 커졌던 셈이다. 그리고 책임과 친밀함이 하나님 안에서 순환하며 빛을 키워갈수록, 내 안의 기쁨과 감동과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이것이 순환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실재 되는 생명(Life). 윤회는 어두움이 돌고 도는 것에 불과하지만, 생명은 순환하고, 꽃을 피우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다. 양자는 매우 차이가 크다.


결국,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가? 이 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일과의 차이를 비교, 대조해보면 매우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본래 진리란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다. 사람의 일은 이기심(利己心)을 중심으로 반복된다. 이기심은 곧 결핍에서 근거하며, 결핍은 열등감과 죄의식에서 근거하며, 이는 집단 무의식의 두려움, 공포, 불안으로 근거하며, 이 어두움이 곧 자아는 열등하고 타자는 우월하다는 비교로 작동하며, 이 비교로 말미암아 자아는 부정하고 타자,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원리로 작동하며, 이 동일시는 곧 외부세계에 대한 욕망으로 투사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일은 이타심(利他心)으로 순환한다. 이타심은 곧 기쁨에서 비롯하며, 기쁨은 곧 감동에서 비롯하며, 감동은 경외에서 비롯하며, 경외는 경이로움에서 비롯하며, 경이로움은 사랑으로 신의 품 안에 안기는 것에서 비롯하니, 결국 내 영혼이 그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기쁨이 경이로움이 되고, 경외가 되고, 감동이 되고, 기쁨으로 현현하니, 이 기쁨이 곧 "나는 이미 가득 찼으니 이 넘쳐나는 것을 주변에 나누고 공유한다"는 이타심으로 현현케 한다. 이타심은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기쁨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되니, 더 이상 채워넣는 것은 내게 의미가 없고, 오직 공유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실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일은 곧 이타심을 내는 것, 그리고 이 이타심으로 말미암아 빛을 주변에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일상 속에서 남을 돕는 것, 은밀히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마음속으로 축복하는 것, 더 나아가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善)에 감동받고, 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마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마음은 곧 "가장 높은 의식의 진동수"이니, 선으로 기뻐하고 선으로 감동받는 마음으로 깊이 몰입할 때, 그 영혼은 환하게 빛이 나며, 그 빛은 신성하고 고귀한 것이니, 그가 거하는 곳의 모든 어두움들이 바로 그의 몰입으로 말미암아 실재적으로 비추어지고 밝히어지는 것이다. 99%의 어두움이 밝혀지는데는 1%의 빛이면 충분하다. 이것을 체험하여 깨달은 자는 이제 더 이상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삿된 어두움들로 인하여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이들과 그들이 거하는 공간을 (그분께서 허락하실 때에)오히려 기쁘게 찾아가게 된다. 어두움은 감히 빛을 이기지 못함이요, 오히려 내가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동받는 그 마음에 매 순간 깊이 몰입하고 빠져드니, 그 마음이 곧 빛이 되어 그 어두움을 능히 비추어 밝히고도 남음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축복의 기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나만의 비법 같은 것이다. 축복의 기도는 문자 그대로 다른 영혼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이때, 나는 "통로"가 된다.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이미 이루어져야 하며, 이로써 나는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쓰임받는 자녀"로써 실제로 영혼이 정렬되고 전환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통로가 되매, 나를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된다. 가장 먼저, 성령께서 내게 "축복을 받아야 할 영혼"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신다. 이것은 육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내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의 태도가 불량하고 이기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그의 영혼의 선함과 순수함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나의 눈은 상태와 현상에 기만당하지만, 성령의 눈으로 보여졌을 때는 그 영혼 안의 가장 깊은 곳의 순수함과 선함과 아름다움마저도 훤히 꿰뚫어볼 수가 있다. 나는 이 특유의 감각과 느낌에 매우 익숙하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영혼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동을 느끼며, 바로 이것이 '신호'가 되매, 나는 축복의 기도를 한다. 축복이란, 축복받는 자(대상자)의 영혼 안에서 어두움은 낮아지고, 빛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현상계이기 때문에, 아무런 장치 없이 저절로 빛이 높아질 수는 없다. 따라서, 그의 안에서 빛이 높아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어두움을 누군가가 대신 짊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축복의 기도"는 곧 "대속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의 어두움을 내가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가 빛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단, 명심해야 할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중보와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그 유일한 권세와 영광이 계신 것이며, 엄밀히는 축복하는 자가 아니라 그 자의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고 대속하시는 것이다. 다만, 그분께 짐을 떠넘긴 채로 나는 게으르고 교만하게 있지 않고 그분의 길에 참여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어두움을 대신 짊어지는 "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그분께 청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어두움은 내가 대신 짊어지는 것"처럼" 보여지며, 실제로 청을 드린 자는 그의 어두움을 여러 가지 형태로 대신 '체험'하게 된다. 이를 대가로 하여, 그 대상의 영혼 안에서 빛이 높아지게 된다. 나는 이 전체 과정을 "축복의 기도"라 부른다. 이때 명심하여야 할 것은, 이것을 행할 적에 단 한 순간도 그 어떤 절차도 "내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은 오직 "나를 통하여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만 통로로써 그 과정에 참여하며, 그 참여 자체로 인하여 기뻐할 뿐이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이기심의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고 열등하고 미성숙한 나의 자아를 품에 안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희생함으로써 다른 영혼의 축복과 은혜를 위한" 이타심의 신앙이다. 그리고 이기심은 사람의 일이니 그에 집착할수록 어두움에 점점 더 구속될 것이지만, 반대로 이타심은 하나님의 일이니 그것을 진실로 열망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과 친밀해질 것이며, 사랑에 빠질 것이며, 품에 안기게 될 것이며, 결국 "하나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신과의 하나됨, 이 자체가 곧 구원이며, 복음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복음과 사역을 열망하면 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결과이지만, 반대로 개인의 구원에 집착해봤자 복음과 사역의 길은 열리지 않으며 오히려 갈수록 사망과 죽음의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타심을 일으키는 것, 신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그저 낭만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 "더 큰 선을 지향함을 통하여 훨씬 크고 높고 완전한 길을 걸어가는" 매우 이상적이고 능동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먼저 신의 일에 동참해라. 그러면 신과 함께할 것이다.

신과 함께하는 자는 신의 품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신의 품 안에 거하는 자는 신과 사랑에 빠져서 하나가 될 것이니, 이것이 곧 구원이다.


일상 속에서 빛을 나누고 공유하는 삶, 이것이 곧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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