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심장 뜀과 숨결을 들으니
실존의 무게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수많은 영과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르게 하였던 그 유일한 계기는 결국, 각자가 마주한 실존이라는 무게로 인한 것이었으며, 이는 곧 사람은 원인 모르게 태어나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되, 자신은 전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처절한 반성 하나로 인한 것이었다. 오늘이라도 숨을 거둔다면, 나는 죽음이 완전한 무(無)로 이르노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신이 계신다면, 나는 죽어서 신 앞에 설 것이다. 신이 없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일 것이다. 그 실존의 무게 앞에서, 압도적인 두려움과 경외 앞에서, 결국 한 영혼은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고작해야 인간의 지성과 이성과 의지와 능력과 지혜 따위로는, 그러한 존재론적 과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그는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책을 아무리 읽어봐야 허망한 일이다. 아무리 논리를 세우고 사유체계를 확립한다 한들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부질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죽음과 삶과 존재에 대하여 사유한다고 한들 죽음 앞에서 다 허망한 일이다. 아무리 신에 대하여 개념화하고 체계화한다고 한들 다 결국에 헛된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다. 수행이라고 해서 다른가? 묵상이라고 해서 다른가? 그 "행위"들은,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마11:28)으로부터 나를 진실로 해방시켜줄 수 있는가? 기도하다 죽으면, 묵상하다 죽으면, 명상이나 참선이나 하여튼 수행이나 수행 비스무리한 것을 하다 죽으면, 죽음이라는 문을 고요와 평온과 기쁨 가운데에서 온전히 건너갈 수 있는가.
거듭 말하지만, 나는 기도하는 자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할 말은 없다. 나는 묵상하는 자다. 그러므로 묵상하지 않는 자에게 할 말이 없다. 나는 찬양하는 자다. 그러므로 찬양하지 않는 자에게는 해줄 말이 없다. 마침내 나는 신을 믿는 자다. 그러므로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어떤 이야기도 해줄 수가 없다. 끝끝내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서 아버지와 하나됨"이라는 복음적 진리를 사는 자다. 그러므로 복음(福音)의 길을 걷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줄 말이 없다. 나의 모든 언어들은 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쓸 적에, 나는 심호흡하고, 고요히 그분께로 몰입한다. 그리하여 "일체가 다 그분이심" 안에 깊이 빠져들매, 그것이 나를 사로잡고, 그 순간에 나는 일상적 마음의 상태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로움과 평화 가운데에서, 내 것이 아닌 언어들이 나를 통하여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것을 본다. 나는 그것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마치 물고기가 배우지 아니한 채로 태어나면서부터 물 속을 편안히 유영하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그 언어들을 "듣고", 또한 "옮기는" 것이 편안하다 뿐, 그것들이 내 것이 아니며, 내 소유가 아니며, 내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러한 자다. 나의 모든 글들은 오직 아버지께로 말미암으며, 또한 위에서부터 주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들을 온전히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허락받았을 때에만 조심스럽게 이를 전하는 것, 그 열매들이다. 나의 언어들은 개념으로 지식으로 이성으로 들으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이 어려울 것이나, 나의 언어들은 나와 같은 영혼을 가졌고 나와 같은 심장을 가진 자들은 너무도 편안하게 받아들여 흠뻑 젖을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다.
여러 형제들이 각자의 길로 나아가는 것들을 나는 옳다 그르다 따질 수 없다. 그러한 일을 할 권세를 허락받은 적도 없고, 설령 주어진다고 한들 감히 그러고 싶지 않다. 다만 그분께서는 나를 태어나면서부터 고독하게 만드셨고, 유독 상처받기 쉬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주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집단성"에 대한 에고의 함정과 죄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하였고, 그 실체를 낱낱이 마주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 뜻에 집착하고 내 욕망에 메달리며 내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광적으로 마음이 기만당하는 그 실체들을, 가장 처절하게 깨부수시며 온전히 마주하게 하셨다.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열망을 지닌 영에게, 그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나이에, 아무것도 허락해주지 않으셨고, 그 어떤 약속도 주지 않으셨고, 언제 어떻게 뜻을 이루실 것인지를 전혀 알려주지 않으셨으되, 그저 기약 없는 기다림만을 명령하시니, 내가 그 지독한 시험을 지금껏 수 년을 견디어오면서, 매번 나의 형제들과 이별하였고, 매번 나의 인연들과 헤어졌으며, 그때마다 실낱 같은 희망마저도 그분께서 "아직 나의 때가 아니다"며 거두어가시는 것을 선명히 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외부적인 삶의 과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내 인생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들은 여전히 도처에서 그 흉한 칼날을 번뜩이며, 불안정성과 불완전성과 불안이라는 오랜 죄성을 내 앞에 드러내어 나를 그분께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매 순간 미쳐서 날뛰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죄성이 어떻게 보이는 마음(mind)을 그토록 완벽하게 지배, 장악, 기만하는지를 지금껏 보았다. 보았으므로, 순진한 자들과는 달리 어두움의 실체에 대하여 모른척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내 길이었다. 실존 앞에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고, 또한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함께 손잡고 건너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을 나 홀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이라는 그분의 시험 앞에서 내가 간절히 묵상하매, 그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의 과정들을 나 홀로가 아닌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 어려서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성장에는 성장통이 따른다는 것을, 아픔과 고통이 없이 순전한 행복한 성장 따위는 육을 입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반드시 선악과를 먹었어야 했음을, 그리하여 낙원에서 상실되어 처절한 죄성 한가운데에서 발버둥친 끝에 다시 머나먼 여정을 거쳐 순수성(Innocence)을 회복해야만 함을, 나는 결국 알았기 때문이었다.
인생에는 세 가지의 절대적인 과제가 있다. 그것들은 아버지께서 모든 영혼들에게 던지시는 시험이다. 시험은 곧 문제를 내시는 것이다.
그 첫째는, 탄생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 둘째는,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셋째는, 죽음이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는 말은 틀렸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컨트롤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이익이 되는 최우선 순위를 자유 의지로써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은 그러하지 않다. 나(ego)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고, 또한 어떻게든 눈앞의 삶을 살아야만 하며, 하루를 감당해내어야 하고, 또한 죽음이라는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심판관의 시선을 언제나 받으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 앞에서,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이 아니라 "답을 제출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질문 앞에서, 내가 "이번 생"이라는 시험 기간 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어떤 답안을 제출할 것인가.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매, 나는 오늘이 이 시험의 마지막인 것처럼 결국 그리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답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이다. 죽어서, 아버지 앞에 섰을 적에, 내가 그분의 질문 앞에서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 질문을 마주한 자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가 없는 법이다. 자신의 모든 깨달음과 지혜마저도 그 질문 앞에서 "검열"되었을 적에,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 역시도 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질문들을 통과하는 것이 반드시 거기 있으니, 이것이 곧 진리요, 그 최후의 "진주"(마13:45-46)를 손에 넣은 자는 마침내 인류 집단 전체가 죽음 앞에서 결국 발견하지 못하였던 그 유일하고도 영원한 빛을 목격하는 것이다. "부활의 희망"이라는 빛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요, 그 빛으로 말미암아 내가 살아서도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서도 영원히 살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아니, 확신이 아니요, "이미 보았으매 깨닫는" 것이다. 살아서 먼저 아버지를 만났으니, 죽어서도 아버지를 만나러 갈 것임을 아는 것이다. 나는 오직 아버지와의 하나됨을 육의 차원에서도 체험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또한 그 하나됨을 평생을 걸쳐 삶 속에서 표현하기 위하여, 저 풀들이나 꽃들이나 나무들이나 햇빛들과 같이, 그리 태어났으며, 또한 죽어서는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영혼을 품에 안으시매, 이 한 생애를 살아내느라 수고했다고, 너의 모든 순간들을 다 지켜보았노라고, 너의 생의 모든 순간들로 인하여 내가 크게 기뻐하였다고....... 그분의 품 안에서 그 말을 들을 적에, 내가 이미 살아서도 영의 눈으로써 그 일을 다 보았으며, 또한 그 순간에 내가 편안히 눈을 감는 것이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들을 오직 신께로 돌아가서 신 앞에 설 준비를 하면서 그리 살아온 자에게, 죽음이란 공포가 아니요, 마치 한여름 밤에 편안히 잠드는 것과 같으니, 이는 나를 지으시고 내 삶을 이루시고 나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그리고 어디에 계시는지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보이지 않는 영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의 삶과 일상의 모든 순간들마다 다 선명히 체험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법이며, 보이는 허망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에(Where)" 계시지 않는다.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을 분리하여, 하나님 아닌 것(부정)을 배제함으로써 나머지 하나를 찾으려고 드는, 이원론적인 현상계적 세계관과 의식 구조 안에서의 죄성에 물든 사고의 작동의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육과 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계신 바와 같이 땅에서도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어디든 다 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동차들, 노을이 지는 하늘, 새벽 산책길의 별빛들, 깊은 숨을 내쉬면서 그리 홀로 외롭게 걸을 적에, 그 고요함으로 함께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산을, 숲을, 호수를, 물결을, 햇빛을, 보아라.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가? 그것들 앞에서 "어떻게 그걸 보아야 합니까?"하고 물을 건가? 그것은 그저 "보여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1인칭 능동태"라는 자기 주권을 손에 쥐고서는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보다 내가 더 높다"는 무의식적인 교만이라는 원죄 앞에서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모든 존재와 사건과 현상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것뿐이며, 또한 일상의 모든 사소한 공간들과 그 안의 평범한 것들 가운데에서 임재하시는 그분이 느껴지지 않는 것뿐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요5:41-42),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또한 그렇기에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외면할 뿐이다. 그분은 결코 그분께로 이르는 길을 "특별한 소수의 영혼들에게만" 알려주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럴듯한 "영적 지식" 따위가 없더라도, 누구라도 다 그분께로 이를 수 있도록,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너무도 명확하고 선명한 길을 모둔 영혼들에게 다 열어두셨다. 그리하여 모든 영혼들이 언제라도 그분께로 돌아오기만을, 천상의 모든 천사들과 더불어 기다리고 계신다. "문" 너머에서. 그 문을 넘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기 삶의 실존하는 시련과 고난을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 사람은 자기가 편안하고 만족스러우면 신을 내다 버리는 존재요, 또한 자기가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플 때에만 신을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죄다. 나는 이것을 영적인 은유로 쓰고 있지만, 지상에서와 달리 천상에서는 은유가 사실보다 더 높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죽음이라는 실존적 과제를 매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그 "시험"으로서의 삶 전체를 내가 온전히 사랑하고, 또한 그 여정의 순간 순간들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면서 자기 삶의 시련과 고난은 싫어하는 자는 거짓이요 위선일 뿐이다.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안고서 홀로 하루하루를 견디어가는 그 삶의 과정들은 거부한다면, 그것은 결국 위선일 뿐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이다. 삶의 실존적 과제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곧 그 과제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이다. 나는 본다. 온 세상이 다 부질없고 허망한 행위와 의례들로 신을 찬양하고 신의 이름을 드높이면서, 정작 자신의 존재와 내면과 삶과 일상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돌린 채로 육에 속한 자들끼리 모여 허망한 것들에 천착하면서 그리 사는 집단적 존재 방식들을. 그분은 물론 용서하시겠지만, 또한 그 존재마저도 사랑하시겠지만, "기뻐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깨어나라. 그리하여, 매 순간을 신의 품 안에서 살아라.
일상의 모든 사소한 순간들을, 그분의 가슴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들어라.
삶의 모든 순간들을,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라.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그분과 손잡고, 함께 걸어라.
죽어서야 신을 찾지 말고, 이미 살아 있을 때에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라.
그리 사는 자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그분의 품에 안기어 편안히 잠들 것이다.
또한 살아서의 모든 순간들에 진실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함께할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이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