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절대적인 고요와 평강으로
혼의 차원에서의 신비 체험들은 직접적이고 농도가 짙은 것들이 많다. 그것들은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며, 육체적인 감각을 동반하기도 하고, 환시나 환영, 계시와 같은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동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혼의 차원에서의 신비 체험들은 많이 허락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소위 "직접적인" 체험들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정도. 그런데 그것도 결국 나중에 가서는 내려놓게 되었다. 그 에너지가 결국 생명인데, 보이지 않는 기운을 느끼나, 꽃향기를 맡으면서 기쁨을 느끼나, 그게 그거이며, 심지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고귀한 것임을 머지않아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혼의 차원의 체험이 너무 강렬하면, 그것은 영의 차원으로 도약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다만, 내게 있어서 기운을 느끼고 에너지를 느끼는 것은 "증거"(히11:1)로써 귀하기는 하다. 뜻을 이루실 때는 물론, 나를 살리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과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고자 하시는 뜻대로 이루셨으며, 결국 그 여정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때가 임할 적마다 좌절되고 넘어지되, 그 가운데에서 더욱 깊은 영의 성숙함과 깊어짐과 평화를 느끼는 것으로 은혜가 주어지곤 하였다. 처음 공부할 때, 나는 오컬트적 세계관이 무척이나 매력적이게 보였다. 솔직히 멋지지 않은가. "마법(Magic)"이라니! 그러나 그 시기는 길지 않았고, 나는 곧 서양 오컬트와 신비주의로 상징되는 영적 세계의 전통들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 영혼 안에서 실제적인 성장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저 수많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현상들과 체험들과 원리, 법칙들이 죄다 무슨 의미가 있지? 그 물음은 내 영혼 안에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고, 동시에 끊임없이 길을 찾고, 진리를 열망하게 했다. 불덩어리가 있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에너지나 느낄 수 있으면, "증거"로써 충분하지. 이것도 기껏 공들여 수행해도 느끼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을진대, 이만하면 오히려 감사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직접적인 체험에 대한 욕망을 손쉽게 넘어섰다. 사실 그것은 내게 별로 기쁘지가 못했다. 나는 그 시절 함께했던 이들과는 달리 전생이나 후생을 보지도 못했고 명상 중에 빛이든 뭐든 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딱히 그 사실이 부끄럽거나 억울하지도 않았고,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다. "보이는 것"은 내 영혼을 별로 기쁘게 하지 못했다. 그냥, 그랬다.
그런데 영의 차원으로 넘어서는 순간, 오히려 직접적인 체험은 사라진다. 정확히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몸으로 뭘 느낀다든가, 뭘 본다든가, 이런 건 거의 없어진다. 원하면 할 수 있으되, 딱히 원하는 의도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다만, 기묘한 "감각"이 열린다. 보이는 건 그대로다. 그냥 일상적인 것 그 자체다. 무슨 번쩍번쩍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자체다. 맑은 공기, 따뜻한 햇빛, 평화로운 오후, 그냥 그대로다. 그런데,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그분이 임재하셨다는 것이. 평소보다 그 임재의 "밀도"가 급격하게 높아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치유의 은사를 발현하는 자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에너지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다른 때보다 특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악기를 연주하는 자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진동과 파동과 공명이 깊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공간의 에너지의 상태는 곧 그 공간의 주인의 의식 상태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공간이 어두운지, 어떤 공간이 밝은지, 그리고 공간이 "충분히 깊어져야만", 그 공간이 "그분께서 쉬시는 은밀한 성소(Sanctum)"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혼이 얼마나 순결하게 정화되어 있는지, 그의 영이 얼마나 깊고 선명하게 깨어나 있는지. 느껴진다. 누가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누가 "아직 아성이 죽지 못했는지"...... 모든 것들이 다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순간에, 햇빛과 바람과 공기 속에서 "스며든다." 그것은 영의 감각이다. 나는 지금 절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물이 차가운 것처럼, 공기가 서늘한 것처럼, 그리 정말로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때, 나는 기묘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아무런 의도가 없이 그저 기분 좋게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는데, 나의 이성의 통제가 느슨해진 빈틈을 타고서 예고 없이 그분이 임재하시니, 나의 영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신랑을 영접하여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신부의 그것과 같은 심정으로...... 나를 울게 한다. 나 원 참. 나는 울 생각이 없었다. 울 계획은 전혀 없었단 말이다. 그 빈틈을 타고서, 스쳐 지나가듯이 들은 어느 학생들의 짧은 한 마디가(편의점을 찾는 어른에게 "저쪽으로 가시면 되요." 하는, 정말로 별 것 없는 말이었다),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하였다. 나는 그 순간, 그 아이들이 "불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를 그 순간 엄히 꾸짖으시고는, 그 아이들의 영혼을 내게 보여주셨다. "보아라, 저 아이들의 선한 영혼을." 나는 크게 부끄러웠다. 회개의 순간은 그렇게 찾아온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어서", 그것이 나와 더 오래도록 함께해주시겠다는 약속임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위하여 우스갯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알았다. 그것이 결국 억울함과 수치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 최후의 죄성이 미쳐서 발광한다는 것을 알았다. 왜 "아직도" 고통스러운 기다림이 이어져야만 하는지, 절절하게 알았다. "내" 눈 따위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이미 알았음에도, 여전히 그리도 교만함이 남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또한, 성령께서, 마땅히 전해져야 할 음성을, 마땅히 받아야 할 영혼에게, 마땅히 전하라고 하실 때에는, 나로 말미암아 그 무엇이라도 이루실 수 있음을 알았다. 내가 스스로 표현한 바, "나의 영이 엎드려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절대적인 고요와 평강 한가운데"에서 내 입이 스스로 움직여서 말하니, 그 순간에 나는 너무도 선명한 "절대적인 확신"을 밟고 섰으며, 그 가운데에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진리"여야" 하는지를,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었다. 그 음성을 전할 적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축복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시는지를 내가 전해듣고 이를 그에게 전할 수 있었을 때, 그 순간에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절실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생에 태어났다는 것을, 영혼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음성을 전할 때,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 일하다 죽어도 좋으니까, 오직 그 일을 할 기회만이 주어지기를,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나의 "욕망"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말씀은 생명이다. 사실, 나는 말장난을 싫어한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몇 줄 안 되는 성경 읽은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왜 부끄럽냐 하면, 정말로 몇 줄 안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말씀은, 아니 "말씀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모습을 드러내어 보여주신" 것은(이건 절대 은유가 아니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 보던 중에 그 문장이 거기에 그대로 적혀 있었단 말이다), 요한복음 11장 25절 ~ 26절 말씀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아, 그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이 말씀을 "해설"하려면 생각을 좀 해야 한다. 부활이라는 건 그 의미지, 생명이라는 건 그 의미지, 이 부분의 죽음은 그것이고, 저 부분의 영생은 그것이지, 이렇게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말씀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에 말씀을 "이미 믿고 있었다." 그 문장 하나 하나가, 나의 영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도 내게 큰 감동이었다. "부활"이라니, 이게 얼마나 감동스러운 말인가. "생명"이라니, 이게 얼마나 경이로운 말인가...... 이걸 어떻게 "나는"이라고 1인칭으로 가리키실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순간 그분의 신성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다 알았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이 한 말씀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가르침을 한 번에 다 깨달았다. 아, 이게 그것이구나.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 말이 나를 그냥 기쁘게 했다. 이유는 여전히 모른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기쁜지, 감동인지, 모른다. 나를 더 크게 감동받게 했던 것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 는 그분의 물음이셨다. 이 물음에 그녀는 "최후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요11:24)고 답했다. 보통 이 말은 믿음의 증표로 이해되는데, 나는 다르게 들렸다. 그 뒷 이야기를 읽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겠구나.' 왜냐하면 눈앞의 그분은 "지금", 라자로가 살았다, 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어서 죽은 라자로를 묻은 무덤 입구 바위로 향하셔서, 그것을 치우라고 명령하시니, 나는 그 장면에서 다른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것은 잘 모르겠고, 그 장면 전체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그 장면 전체에서 딱 한 단어로 인하여 또 다시 그분의 천둥 같은 음성을 선명히 느꼈다 : "큰 소리로 라자로야 나오라 하시니"(요11:43), 내 귀에 "나오라!" 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너무 선명했다. 그것은 내가 감히 증언하건대, 성부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권세와 영광을 휘장처럼 두르신 채로, 죽음과 사망조차도 감히 거역할 수가 없는 절대적인 명령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죽은 라자로의 육신과 영혼일지라도 그분의 명령 앞에서 거역한 채로 누워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나오라!" 그 한 마디로, 나는 그 장면 전체가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다 알았다. 부활이었다. 부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내가 아무리 어두움에 깊이 잠겨 죽을 것 같은 순간에서조차도, 나를 "살리실 것"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내 육신이 허락된 천명을 다하여 썩어서 없어지더라도 그때에도 나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실"(요14:18) 것이라는 약속이셨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그리도 "나오라"는 한 마디에 이리도 몰입하는지를 모른다. 왜 그 한 마디가 나를 울게 하는지를 모른다. 모른 채로, 아니, 모르니까 더 좋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요1:1)이라는 것을. 말씀이 정말로 생명이라는 것을. 내가 정말로 "그" 하나님을,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이" 하나님으로 만나뵙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어린 나이에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무수히 죽었고, 또한 그때마다 그분께서 내 안에서 다시 십자가를 지셔서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시매 나의 영혼을 살게 하시니, 그 언약이 실재임을 알았다. "감동", 이것은 사실 설명되기 어려운 영의 차원의 가장 깊은 신비 체험이다. 말씀으로 인하여 감동받는 것. 그리고 이유도 영문도 없이, 길가는 평범한 사람이 "그분께서 너무도 크게 기뻐하시는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이에 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어두움을 내가 대신 지겠으니 내 축복을 그에게 다 주소서"하고 기도드리게 된다는 것. 그 기도가 억울하지 않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 말하건대, 나는 원래 이토록 고귀하지 않다. 나는 이토록 신실하지 못하다. 그래서 더 기쁜 것이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기"(마19:26) 때문이다.
영의 차원의 신비 체험이야말로 "진짜"다. 내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말 자체가 너무도 큰 감동이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를 경외하고 경이롭게 한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너무 경이로워서 함부로 글로라도 쓸 수가 없다. 나는 "그분"이라는 말이 편안하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이 나를 너무도 기쁘게 한다. 그 확신이 나와 함께하는 순간이 너무 눈부셔서 참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분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그 누구도 모르는, 나와 그분만이 아는 그 하나됨으로 조용히 일상 속에서 머무르는 그 순간들이 너무 좋다. 잠시 내 곁을 떠나신 것처럼 느껴질 때의 외로움마저도 이제는 좋다. 왜냐하면 다시 때가 되면 내게로 오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오셔서는, 내 안에서 절대로 의심할 수가 없는 압도적인 감동과 기쁨을 일으키시고는, 곧 다시 떠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서 다시 돌아오실 것을 믿는 어린아이"가 되어서, 내 눈 앞에 아버지가 보이지 않더라도 울지 않고, 차분히 그 시간들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음성을 전해야 할 날이 오면, 내가 다시 그분의 일을 행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대적인 확신과 기쁨 한가운데에서 나로 인하여 자그마한 빛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 하나를 진심을 다하여 증언하고 싶다.
말씀은 실제로 살아계신다. 믿는 자의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