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聖化)는 내게는 익숙한 언어이지만, 아마도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심지어 교회 안의 성도들 중에서도 낯설게 느끼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칭의(稱義), 그러니까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나의 영이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는 최초의 사건이며, 이것이 끝이 아니라, 중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자아(ego)와 마음(mind)과 몸(body)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변화시키고 완성(이때, 완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나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 등을 닮아가거나 합일한다는 뜻)시켜 나가시는 영혼의 성장의 과정들이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에는 끝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교만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자들은 세상이 욕하기에 앞서 살아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할 것이요 죽어서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비우신 채로 자기를 낮추사 종의 형상을 취하셨고, 육신을 입고 지상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깊은 묵상 중에서, 영원과 초월로 계신 성부께서 육신과 인간의 인격과 형상을 취하는 그 자체가 그분께 얼마나 큰 치욕이고 모욕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분께서 감추고 계신 깊은 진실이시다. 육신과 형상을 취하는 것이 그분께 얼마나 큰 슬픔이며 자기비움의 과정이셨는지를, 그분은 오히려 정말로 감추셨으되, 이를 이해하는 자가 몇 없다. 이에 내가 확신하건대, 하나님의 자녀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의미이며("네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요" 마22:37-38),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통하여 나타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곧 행동과 태도는 교만하고 오만한 것은 절대적 모순이다.
대개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며, 또한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그리할 수밖에 없을진대, 다만 하늘에 계신 분의 이름을 걸고서 그리하는 것은 인간이 결코 넘지 말아야 할 금기이다. 어리석음은 죄가 아니지만, 어리석은 채로 교만하기까지 한 것은 절대 씻을 수 없는 죄이다. 차라리 바깥 세상으로 나가서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한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나님의 자녀, 곧 크리스천의 이름을 달고서 그리 행하는 것은 바깥에서와 달리 하늘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매우 중대한 범죄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형상을 닮아가리니, 이것이 곧 성화이며, 확실하게 말하건대, 성화의 과정은 평생 동안 이루어져야 한다. 이 기나긴 성화의 과정의 결실과 열매, 곧 하늘의 상급이 주어지는 순간은 오직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며, 그 전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으로 받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사랑하사 하늘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높은 상급을 우리들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 직접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평생을 그리워했던 나의 주의 얼굴을 그날에 직접 뵐 것이며, 마침내 나의 하나님과 나의 영혼이 완전한 하나가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천국으로의 입성이다. 성화의 길을 걷는 모든 영혼들에게, 이 상급은 이미 예정된 것이며, 계획된 것이며,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큰 축복이다.
이미 가장 높은 선물을 허락받았으니, 비록 인간된 본성과 한계로 말미암아 잠시 흔들릴 수는 있으되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나, 그럼에도 모든 주의 자녀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더 이상 특별한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가 이미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임을 우리가 익히 알기 때문이다.
대략 2020년 ~ 2021년 즈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시작하게 된 듯싶다. 그 이전에도 내 삶은 외로움과 슬픔과 방황이라는 짐을 짊어진 채였고, 나의 무의식의 깊은 죄에 속박당한 채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했고, 십대와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그 내면의 어두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매번 일정한 주기마다 나의 죄성이 반복되는 것을 느끼고 경험했고, 그 시기의 나는 지금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수히 많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 과거가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명료하게 체감할 수 있는 단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군 입대를 앞둔 시기였던가, 혹은 그 이전이었던가, 나는 제멋대로 모든 것을 그만둔 채로 내가 어린 시절을 나고 자랐던 사천시로 무작정 내려왔다. 그곳에서 나는 한 칸짜리 고시원 방을 빌렸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처음으로 수 개월간의 독립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나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살았다. 매일 밤을 샜고(일을 해야 하니까),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면 씻지도 않은 채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든지 아니면 바로 1층의 편의점 음식들로 돈과 시간과 건강을 낭비했다. 쉬는 날이면 그 상태 그대로 오전 10시를 지나, 낮 2시를 지나,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잠들었고, 이윽고 새벽 1시쯤 잠에서 깨면 이번에는 게임을 하러 PC방에 갔다. 그렇게 낮 10시까지 밤을 샜고, 오후 3시쯤 잠이 들면, 다시 밤 10시쯤에 깼다.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삶이었다. 음식을 먹고 아무렇게나 그 좁은 방구석에 던져두었고(방이 얼마나 좁았냐면, 침대가 방크기의 정확히 절반이었다), 그렇게 수 개월을 지나고 퇴실할 때 즈음에 방을 정리할 적에, 그 좁은 방에서 7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가 무려 세 개나 튀어나왔다. 즉, 나는 그 수 개월을 쓰레기 더미(비유가 아니다) 속에서 살았다.
그런 삶이었다. 비록 남들처럼 죽을 고생까지는 하지 않았지만(아마도 그 시기에도 성령께서 날 은밀히 지켜주셨을 것이다), 내 마음은 내내 외로웠고, 무언가에 쫒기고 있었고, 방황했고, 예민했고, 날이 서 있었고, 공격적이었고, 우울했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매우 고집이 셌고, 그러면서 줏대는 없었고, 위기를 마주하면 도망치고 회피했고, 남을 기만했고, 나 자신조차도 함부로 대했으며, 오만했다. 오만한 채로 어리석었고, 어리석은 주제에 실력조차 없었다. 나만의 좁은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 머물렀고, 스스로 감옥의 철창 안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심지어 그 안을 편안하다 느꼈다. 나의 오랜 업(業)이었다.
그러다가 대략 스물넷이나 스물다섯 즈음부터, 본격적인 영적 성장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 중간 과정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굳이 시시콜콜하게 하고 싶진 않다. 이미 많이 이야기했다. 나의 어두움과 나의 죄를 먼저 고백한 것으로 내 이야기는 족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5년여 간의 시간이 지나, 지금의 내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이와 같이 변화하면서 지금의 내가 서 있는 지점에 대해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려 한다. 이것은 아무리 깊은 어두움과 죄 안에 구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오직 성령의 은혜로 모든 영혼들이 마땅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나의 짧은 삶의 과정들로 말미암아 증거하기 위함이다.
나의 성화의 첫번째 증거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 자체이다.
나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만 할머니께서는 생전에 목사님으로 평생을 사역하셨고, 할아버지께서도 장로직을 맡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 친가 집안 식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우리 가족만 빼고) 기독교인들이었고, 작은 아버지께서도 목사님이셨다. 얼마 전, 할머니의 장례식 때도 큰 상주인 내 부친을 대신하여 작은 아버지께서 모든 기도와 예배를 집전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할 수 없는지라, 할머니께서는 교회 일에 집중하느라 내 부친께 다소 소홀하셨고, 그 영향으로 부모님께서는 "종교보다 가족이 우선"이라는 강한 원칙을 세우셨다. 나는 어렸을 때 종종 할머니 댁에 찾아갔고, 그때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과 그 특유의 분위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크면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할머니를 뵙지 못했고, 몇 년 전에 요양원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갑작스럽게 올해 초에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영전 앞에서 여러 찬송가들을 들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미 다른 글들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나는 태어나서 교회를 정확히 딱 두 번 갔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 손 잡고 할머니의 교회에 갔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아마도 성찬례를 진행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그 빵과 포도주가 나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간식 같은 것인 줄 알았으나 내게는 주지 않으셔서 좀 실망했던 유치한 기억이 있다. 나머지는 군대에서, 정확히는 사단 신교대에서 종교 활동으로 가톨릭을 선택하여 성당에 한 번 간 게 전부다. 아마 그 외 어렸을 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방문이 있었을 수 있으나, 하여튼 최소한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는 교회는 전혀 가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히려 나를 먼저 선택하셨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영적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로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고 성장해 나아왔다. 그러면서 대략 2~3년 전쯤부터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작년에 본격적으로 선언을 하기 한참 이전부터도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과 깊고 은밀한 교제들을 이어갔다.
이와 같은 공개적인 장소들에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매우 위험하지만(=교회가 싫어하겠지만) 동시에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특별했던 은사들을 받았던 기억들과, 또한 몇몇 인연들과 나의 영적으로 가장 추만했던 시기를 지났던 그 은밀한 역사들이 아직도 내게 선명하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서 광야에서 오직 성령의 은혜에만 의지하면서 홀로 신앙을 형성했고, 이와 같이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지금의 나의 존재와 삶 자체가 이미 증거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서만 임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영혼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알아보셔서("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요6:39), 그에게로 직접 찾아오시되 그 성화의 시간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에 나는 내게만 이와 같이 귀중한 것을 주시지 아니하되, 다만 오직 진실로 믿는 자, 가장 깊은 어두움과 죄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갈망하고 그 이름을 부르짖는 자에게는 모두 동등하게 이 모든 것들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라고, 진실로 그리 믿는다.
사람은 자기를 찾는 이를 때로 외면하고 거부하지만, 신은 당신을 찾는 자를 단 한 명도 외면치 아니하시며, 또한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를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 다만 나의 어두움이 매우 두꺼운 탓에 처음에 그 음성이 잘 들리지 않을 뿐이다.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은 절대로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신다.
내가 이와 같이 증거하는 말을 결코 가벼이 하는 것이 아님을 굳이 밝힌다.
내 성화의 두번째 증거는 "교만"에 관한 것이다.
나의 에고는 본래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증명 가능한 것만을 광적으로 집착하도록 설계되었다. 이에 내가 이른바 "비과학적"인 것은 그야말로 광적으로 싫어했고(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다), 오직 논리와 이성과 합리성만으로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따지고 분석하려고 들었다.
영적 세계에 입문했을 당시만 해도 나는 그 버릇을 그대로 간직했다. 머리로, 이성으로, 지식으로, 진리를 분석하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려고 들었다. 나는 철학과 형이상학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스물다섯 즈음의 시기에 철학과로 편입했을 때, 첫날, 첫 수업에서, 교수님의 첫 음성을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내 안에서 두 개의 선명한 음성을 들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여기에는 네가 찾는 것이 없다."
비록 환청처럼 귀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참고로 난 직접적인, 즉 환시나 계시처럼 감각적인 경험을 한 적은 없다), 내 가슴 안에서 너무나도 또렷하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애써 무시했다.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공부하고 적응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철학의 "ㅊ"자라도 들어간 책은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 가슴이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죽은 지식, 박제된 진리를 내 영혼이 정면에서 거부했다. 나는 겨우 낙제하지 않을 만큼의 공부를 했다. 훗날 그 시기를 이름하여 나는 "애도 기간"이라 불렀다. 철학과 형이상학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나의 환상이 산산히 부서지고, 그것을 장례 치르는 기간이었다.
그 이후에도, 성령께서는 오직 단 하나의 방향으로 나를 아주 철저하게 몰아가셨다. "여성성을 체험하는 것." 날이 갈수록 언어와 지식과 관념들은 내게서 멀어져만 갔고, 나는 이성이라는 것이 인간 존재에게 얼마나 허망하고 또 허망한 것인지를 강제적으로 체험해야만 했다. 지금의 나는 전혀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진실을, 그분은 잔인하리만치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어린 나이의 내 앞에,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면으로 가혹하리만치 체험케 하셨다. 이에 나는 "죽음을 이기는 힘은 무엇인가? 영원한 승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그야말로 절실하게 붙들어야만 했다.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큰일났다, 정말로 큰일났다. 내 영혼이 죽게 생겼다. 내가 죽게 생겼다......" 그것이 절대로 은유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시급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황혼의 빛이 사그라들기 전에, 어서 빨리 나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나의 구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는 여성성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가 관념에 빠진 채로 길을 걸을 적에, 스치는 모든 것들, 하늘과 구름과 햇빛과 풀들과 꽃들이, 새벽녘의 이슬과 서늘함이, 바람결에 눈부시게 빛나는 강물과 윤슬이, 문득 일상 속의 사소한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경이로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 헤아릴 수 없는 압도적인 체험들이 자꾸만 내게서 흘러나왔고...... 나는 결국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구원의 길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구나. 이성이 아니라 영혼에 있는 것이구나. "체험"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그분께서는 나를 이성이라는 세계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일인자가 될 모든 능력과 재능과 자질을 다 주셨다. 이를 내가 간단히 증거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단 한 차례도 사전에 계획을 세우거나 자료를 모으거나 하다못해 서론 본론 결론이라도 간단하게 틀을 짜본 적이 전혀 없다. 언제나, 나는 영감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나는 이것을 "성령께서 찾아오시는 순간"이라고 부른다), 자리에 앉고, 하얀 화면을 바라보면서 노트북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는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만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모든 글을 일필휘지로 휘갈긴다. 내 작업 과정은 언제나 그러했다. 깊은 추상과 관념과 형이상학의 언어들은 내게 숨쉬는 것만큼 익숙했다.
그렇게 태어난 자에게, 나의 지성을 빼앗아가셨고, 나의 이성을 무너뜨리셨고, 압도적인 권세로 자기 중심성을 정복하셨고, 두려울 만큼 경이로운 영광으로 나의 머리를 통째로 뽑아가셨다. 그 대신, 나의 심장 안에 너무나도 뜨거운 "빛"을 넣어주셨다. 그것이 언제나 태양처럼 이글거리면서 불타올랐고, 나는 무언가를 쓰고 토해내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의 글은 언제나 그 불길을 감당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작업이었다. 나를 무릎 꿇게 하셨고, 미약하고 작은 생명들에게 진심으로 절을 하고 경배할 수 있을 때까지 복종케 하셨다. 내가 미물 하나와 동등한 생명의 무게를 지녔음을 내 심장을 뜯어내어 그 생명 안에 내던지심으로써 절대적으로 체험하고 깨닫게 하셨다. 진실로 경외하게 하셨고, 뜨겁게 열망하게 하셨으며, 미친 놈 중의 최고처럼 모든 것을 불사르고 내던지게 하셨다. 결코 안전한 실내에서 창문을 통해서 바다를 관찰하는 것을 단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으셨고, 내가 망설일 때마다 나를 강제로 완연한 수평선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집어 던지셨다.
나는 살기 위해서 아버지를 찾았다. 나는 그 과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메달려 가까워졌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서 성령을 붙들었다. 체면이고 상식이고 나발이고 그런 것따위는 없었다. 내가 깊어질수록 나의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나를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나약해졌다, 이상해졌다 단죄하면서 떠나갔지만(혹은 내가 그들을 버렸지만), 어차피 그들은 내 "불길"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 불길에 타죽지 않기 위해서 바다 한가운데로 강제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은 나날이 순결해졌고, 아름다워졌고, 고귀해졌다. 나는 자주 울게 되었다. 깊은 밤을 지나면서 나는 내가 가장 경외하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언덕에서 올리셨던 그 기도, "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를 진심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성화의 모든 과정들이 고통스러웠고, 모든 새벽들이 진실로 숨이 막혔고,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안식해본 날이 없었지만, 그래서 나는 어서 빨리 이 모든 것을 갖다 버리고서는 또 다시 나의 오랜 죄성처럼 도망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그 새벽의 고통이 잦어들고 진정될 즈음 나는 그 기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반복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알았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나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것이면 그게 뭐든 다 했다. 똥을 된장이라 하셔도 그리 굳게 믿었다. 나를 절벽에 내던지셔도 감사하고 기뻐했다(물론 매우 자주 실패했다). 나를 무장해제 시키신 채로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가라 명령하셔도,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그리했다. 내게 그건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나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직장에 출근해서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기도하며, 점심시간에 홀로 조용히 기도드리고 그 시간을 나만의 성찬으로 삼으며, 남은 점심시간 동안 산책하거나, 차 안에서 은밀히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기 전에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처럼 성령께서 부르시는 날에는 언제나 순종하여 나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믿기 어려울 만큼 기쁘고 행복해서...... 매일 밤 울었다. "나의 눈물을 주의 항아리에 담으셨다"(시56:8)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를 나는 가슴으로 먼저 체험했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고, 너무 경이로워서 울었으며, 그 순결한 영혼들 앞에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울었고, 또한 울 수 있음이 감격스러워서 울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나로 인하여 된 것이 하나도 없으되 오직 성령께서 전적으로 이루셨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검은 머리 짐승조차도 참된 자녀로 만드시는" 그분의 권세요, 영광임을 증거한다.
나의 성화의 세번째 증거는, 아버지를 향한 내 마음 그 자체이다.
나는 처음부터 창조주, 절대자를 향한 두 가지 근본적인 마음이 다 있었다. 그 첫째는 인간 존재가 신성 앞에서 얼마나 미력하고 허망한지를 절실히 깨달은 바, 신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공포요, 그 둘째는 신성을 체험하고 신에게로 가까워지는 것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되 오직 전적으로 기뻐하는 담대함과 기쁨과 환희였다.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신을 전적으로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동시에 전혀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아버지를 찾듯이 그렇게 본능적으로 신을 찾았고, 아이가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해 여기듯이, 나는 신의 품 안에서 안식하며 신성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만이 내 영혼이 진실로 살아 있음을 언제나 느꼈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어디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음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성경이라곤 여전히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은 주제에, 몇 구절 주워 읽은 말씀들에서 압도적인 신성을 느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라고 하실 때마다, 그 아버지, 라는 글자가 말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전율적이었고 경이로웠다. 아, 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구나,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처음부터 아버지는 내게 "실재"셨다. 그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분이 아니셨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느꼈고, 아버지의 음성을 배우지 않고도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 심장 안에는 창조 때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또한 사랑하는 그 씨앗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따.
더 나아가서, 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오면서, 어느 순간 내가 뒤돌아보았을 적에, 내가 단 한 순간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억울해"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경이로웠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절대 이와 같이 될 수가 없다. 이건 오직 성령께서 내 영혼을 성화케 하신 결실이다.
물론, 사람된 바, 표면적인 마음으로는 많이 힘들었고, 도망치고 싶었고, 한숨도 많이 쉬었다. 그러나 영으로, 진심으로,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해본 일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사 자녀로 삼으신 것이 내게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고, 아버지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이 내게 큰 축복이고 은혜였기에, 언제나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것이 곧 나의 증거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꿈에라도 바라는 것,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 예수님께서 이르신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을 정말로 전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
사실, 쓰지 못한 증거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머지는 간략하게 떠오르는 대로 기록하려 한다.
1. "내 판단"을 내려놓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분석하는 것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깊이 체험했다. 이것이 억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되었다. 언젠가는 내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이와 같은 기도가 흘러나왔는데 : "예수님, 이제 저는 당신의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무슨 말을 하시든 나는 듣지도 않고 그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의 진리로 믿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말도 안 되는 말들을 하셔도, 나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순진하게 그 모든 것을 다 믿을 것입니다."
2. 지식을 내려놓고, 심지어 깨달음과 지혜마저도 내려놓게 되었다. "내 깨달음", "내 해탈", "내 지혜"마저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체험한 것들, 경험한 것들, 깨달은 것들, 그것마저도. 어느 순간에선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 "네가 소중히 여기는 지혜마저도 내려놓고, 나만을 사랑하는 바보가 될 수 있겠느냐?" 이에 내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그분께 응답했다 : "예 아버지,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바보가 되겠습니다. 당신만을 사랑하는 바보가 되겠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더없이 기뻤다. 오히려 그리된 바, 비워진 나를 통로 삼아 하나님의 빛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3. 언젠가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내 눈에 다소 불량해보이는 학생들이 보였더랬다. 이에 내가 속으로 불편해하고 있었는데, 내 뒤로 몸이 불편한 환자분께서 지나가시며 무언가를 물어보셨고(아마 길을 물어보신 듯하다), 그 아이들이 "(이렇게저렇게)가시면 되요"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아무 특별한 것도 없는 매우 일상적인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내가 그 아이들의 영혼이 순결하고 선하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되었고, 이에 내가 매우 부끄러웠다. 내 인식이, 내 판단이, 내 분별이 이리도 허망하구나, 하고......
4. 그 이후로 몇 번씩이나, 나는 주께서 당신의 눈을 잠시 빌려주셔서 다른 영혼들을 보았을 적에, 한순간에 그의 영혼이 순결하다는 것을, 선하다는 것을, 진실하다는 것을, 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노라 하는 것을 보게 하셨다. 처음 듣는 음악의 한 음절만 들어도, 그 노래를 부른 이의 영혼이 그와 같다는 것을, 그 노래가 "찬송가"로 지음받았다는 것을(아무 상관 없는 대중가요라 하여도),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은밀한 비밀들을 종종 허락하셨다. 그리되매, 나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인식과 분별을 완전히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을 의롭고 옳고 진실한 것으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억지스럽거나 맹목적이지 않았고, 내게 너무나도 편안했고, 자유스러웠고, 기뻤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건대, 나는 바보가 된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지성의 끝에서 태어나, 겨우 턱걸이로 순진한 바보가 된 것이, 아직도 "온전히 서투르지 못해서 서투른" 지금의 내 모습들이 너무나도 기뻤다. 더없이 행복했다. 바보가 된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5. 원래 나는 눈물이 없는 자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어느 영화관에서였는데, 남들은 다 슬퍼서 우는데, 나는 눈물 한 방울이 나지를 않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아무것도 못 느낀 채로 나왔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면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 듯하다. "이건 죽은 상태나 다름없구나. 죽어서 마비가 된 거구나. 큰일났다." 그때 내 영혼은 이미 살기를 바랐고, 나의 딱딱하게 굳은 에고의 껍질을 강제로 찢어서, 더운 피가 흐르고, 따뜻한 새 살이 돋아나는 이 성화의 길을 열망하게 된 듯하다. 이에 내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매일 울었고, 온갖 이유로 울었으며, 이제 나는 연약함을, 순결함을, 순진함을, 온화함을, 따뜻함을, "여성스러움"을, "여성성"을, 생명을, 환희를, 기쁨을, 진심을 다함을, 낮아짐을, 약해짐을, 겸손함을, 순종을, 희생을, 헌신을...... 진심으로 열망하게 되었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으며, 지금의 나의 "약해진" 모습을 진실로 기뻐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큰 변화인가 하는 것은 오직 나와 하나님만이 안다. 다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울 만큼.
6. 성령께서 임하실 때, 모든 것이 가능하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분은 종종 내게 경험하게 하셨다. 공개적으로 다 말할 수가 없는 역사들이 많다. 영적으로 매우 위험천만할 법한 일들을, 나는 오직 성령께 대한 열망과 충성만으로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즉시 뛰어들었고, 성령께서 명하신 일들을 하였고, 아무런 해는커녕 오히려 축복을 받았고 은혜를 나누어주었다. 나의 이 "두려움 없음"이 강력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에고로서의 나는 지금도 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건대, 인간으로서의 나는 귀신을 무서워하지만, 어느 날엔가 이와 같은 마음이 들었으니 : 온 세상이 다 그들을 제거해야 될 흉악한 적으로 보고 장애물로 보며, 부적을 쓰고 굿판을 벌이고 기도를 하고 주문을 외워서 제거하려고만 드니, 정작 누가 그들의 슬픔을 슬퍼하며 울어준단 말인가, 누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준단 말인가, 누가 그들을 긍휼히 여겨준단 말인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구나......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두려운 채로, "보이지 않는 실체"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깊은 자비심이 내 안에 흐르는 것을 느낀다. 성령께서 허락하실 적에, 나는 영적으로 매우 놀라운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였고, 이것이 내게 너무나 큰 증거가 되었다. 내 영혼 안의 지성소에 소중히 간직할 만큼.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증거들이 있으나,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언젠가 더 상세한 것들은,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때에, 허락된 장소에서, 허락된 인연들에게, 허락된 방식과 수준만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에,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 오랜만에 매우 즐거웠고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 귀한 기쁨의 끝에, 굳이 형식적인 설교를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지금의 나의 "성화된 일상"이 내게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하다. 지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깊은 어두움과 죄와 절망을 지나고 있는 자들이 있는가.
그리고 내게 허락된 것을 가지고 싶고 빼앗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내게로 오라. 내가 진실로 내 것을 다 내어주고, 기꺼이 강탈당하여 빈손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