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시간

by 생명의 언어
IMG_1406.JPG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이를 자가 없느니라." (요14:6)


그 아이는 내게 특별한 존재였다.


한때, 내가 어쭙잖은 공생애를 흉내낸답시고 과분하게 거느렸던 몇 안 되는 제자들마저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중요한 순간에 모두 다 나를 떠날 때에도, 그 아이만은 언제나 내 곁을 지켰다. 그 아이는 자주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영적으로 깊어지고 몰입하는 순간마다 그 아이는 마치 그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빛을 좋아하는 듯했고, 영적으로 내게 의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하늘의 별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 영혼이 그 아이를 "하찮은 동물"이 아니라, "고귀한 영혼"으로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 영혼이 그 아이를 누구보다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그럼에도 결국에는 축복이었다. 그날, 나는 그간의 성화의 여정에서의 결실들에 대한 모든 하늘의 상급을 다 허락받았다. 나는 내가 그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그 아이의 마지막 날에 건네주었다. 그것이 내게 너무나도 큰 위로였고, 동시에 확증이었다.




그 아이가 떠난 이후로 나는 곧바로 육고기 섭취를 완전히 끊었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 죽 집에 들렀을 때에도, 평소라면 고기가 들어간 음식들을 먹었겠지만, 나는 야채죽을 먹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대략 3주 정도가 지나갔는데, 여전히 육고기는 별로 섭취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비건이 아니다. 그렇게 될 생각이 없다. 내 목적은 고결한 도덕성 따위가 아니다. 다만 나는 선천적으로 신을 사랑하고 신성을 열망하며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도록 그리 태어났고, 이에 결국에는 음식을 줄이고, 식사를 정결히 하며, 정신을 명료하게 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망설였고, 그 아이는 날 마지막으로 일깨워주고 그리 떠났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리될 운명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내 신념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렇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할 만큼, 나는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하다. 남들이 고기를 먹든 안 먹든, 삼시세끼를 육류로만 가득 채우든 말든, 그건 결국 그들의 삶이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는 어차피 그들 자신이 짊어지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하다. 다만, 그저 나는 이리되어야 할 때가 찾아온 것뿐이다.


사춘기를 지나고 이십대를 보내면서 숱하게 방황했고, 그 과정에서 몸에 나쁘고 해로운 음식들과 생활 습관들도 더없이 많이 가졌었고, 실컷 사치했고 실컷 낭비했다. 이제 미련이 없다. 이제 서른이 넘었으니, 지금까지의 과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아직은 내 육체가 젊으니, 당분간은 해산물과 계란 정도까지는 스스로에게 허용해줄 생각이다. 그리고 대략 40대에서 50대가 되면, 그것도 전부 끊을 것이다. 그 나이가 되면 나의 영혼의 성화도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사랑이 더욱 친밀해지매, 나는 지상의 음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길이고, 이 생에서의 나의 운명이다.


육고기를 끊기로 결심한 것이 전혀 아쉽지도 않았고 미련 따위도 없었다.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반려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애도의 증거로 이것을 결심했고, 이 자체가 그 아이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나의 의식(ritual)이다. 성령께서 이 애도의 시기에 내 곁에 더욱 가까이 임하시니, 이 시간이 더욱 깊어지고 충만해짐에 참으로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 느낌이 참으로 행복하다.


여담이지만, 내가 원래 진주냉면을 원체 좋아했고, 단골집도 있었으며, 진주냉면에 관한 한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울 만큼 매니아였다. 그 특유의 시원한 육수맛을 정말 사랑했었는데, 오늘 떠오른고로 "고명으로 올라가는 육전만 안 먹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어차피 육수를 낼 때 소고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이별이었다.


작별의 시간은 언제나 예고 없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앗아간다. 그렇게 이별하고 떠나보내고 나서야, 과거의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했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원죄이다. 떠나보내고 이별하고 작별해야만 기어이 그 소중함과 특별함을 깨닫도록 설계된, 우리 안의 교만 때문이다.


생전에 그 아이의 따뜻한 온기를 사랑했고, 그 작은 몸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기를 참으로 좋아했으되, 그 아이가 죽어서 화장되기 전에 그 혈과 육이 참으로 내게 허망하고도 서글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마트나 정육점에 진열되어 있는 그 도살된 혈과 육들이 이전보다 더욱 헤아릴 수 없는 심경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끔 한다. 무어라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는, 어떠한 느낌...... 어쭙잖은 도덕심 같은 건 아니지만, 다른 생명의 혈과 육을 기어이 집어 삼켜야만 한다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슬픔과 애도 같은 무언가가 그 순간에 내 가슴을 울린다. 내 영혼의 진동수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차라리 나의 혈과 육을 함부로 내어줄 수 있었으면 더 좋으련만. 정육점에 썰려서 대롱대롱 달려 있는 그것이나, 내 팔다리 몸통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일찍이 알았음에도, 그 아이를 떠나보내고 나서 이것이 내게 더욱 더 잔인하리만치 선명해졌다. 그러나 다만 내가 이 시기에 나의 육신을 더욱 정결케 하고, 수행에 가깝게 식단을 유지하고자 하는 소망을 지속적으로 품는 까닭은 내 이 부질없는 혈과 육이더라도 앞으로 수십 년간 남은 성화의 길을 걷기 위한 도구이며, 아직 유효 기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잘 보살펴야 하는 까닭에서다.


몸이여, 화장터의 그 한 순간의 불길에 하얀 유골만이 보잘것없는 부피로 남겨지되, 그마저도 가루가 되어 산산히 흩어지고 먼지로 분화하는구나. 살아서 육에 집착함이 이토록이나 허망하고도 허망함이니.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 나는 아침 기도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로 시작하고, 출근해서 차에서 내리기 전에 다시 기도하며, 며칠 전부터는 직장에서 점심시간에도 차 안으로 들어와서 은밀한 가운데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도 기도로 마무리한다.


사실, 내게 형식은 별로 중요하진 않다. 나는 이미 하나님과 사랑에 빠졌고,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언제나 계심을 내가 느끼고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같이 형식과 예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경외의 표현이고 또한, 하늘의 별이 된 나의 반려의 복을 빌어주는 기도이고 의식이다.


내 기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지되, 다만 세속의 사람들과는 점점 더 멀어짐을 느낀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겉으로 존중은 하되, 진실로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리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리라. 다만 그 역시 아쉽지 않다.


관계는 부질없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 누구도 나와 함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한다. 함께 손 잡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는 없다. 육으로 함께하더라도, 영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전적으로 혼자다. 나는 죽어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그리할진대, 모든 관계들은 지상에서의 임시적이고 유한한 것일 뿐, 결국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


살아서 신과 하나되는 것, 신과 친교하는 것, 신과의 은밀한 사랑을 이어가는 것, 이것만큼 인간 존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음의 순간에 날 인도하시는 분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우리 모두는 그분의 심판을 도저히 피해갈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서른 해 정도밖에 지나지 않는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미 무수히 많은 죄를 지었고 후회와 슬픔을 남겼다. 하물며 다 늙어 노인이 되었을진대 우리 손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으랴. 그분께서 심판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신다면, 우리는 그 판결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은밀하게 사적으로 신과 만난다면, 그리하여 신과 나만이 아는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가 된다면, 그때에 날 마중하시는 분은 심판주가 아니요 나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이가 되시리라.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찌 그 사랑하시는 여인을 함부로 대하고 차갑고 냉정하게 대할 수 있으랴.


내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공적으로 다가감이 아니요, 오직 사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다. 이것만이 인간 존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내가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애도의 시간이 내 영혼을 더욱 깊이 성장케 함은 내게 명확하고 선명하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서라도, 내 모든 것을 다 맞바꿔서 앞으로 단 10년만 그 아이와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의지를 믿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정한 것인지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 자력 구원이라는 환상을 기어이 놓지 못한다. 나는 오직 성령께 의지하며, 내가 나를 이끌지 아니하되 오직 성령께서 나를 이끌고 집행하실 것이다.


이에, 내가 성령의 품 안에 있을 적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롭고 온전한 뜻 안에 있을 것이다.



내가 건강하게 이 애도의 시간을 지나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더욱 가까이 내게 임재하시기를.


나의 하나님, 이 시간을 나와 함께하소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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