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으로 살아가는 삶

by 생명의 언어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기쁨"이다. 이것은 쾌락과는 다르다. 직접적인 도파민으로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평안이 흐르고,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감사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이 언제나 내 영혼을 감싸안는 것, 곧 영적 기쁨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빛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그것이 내 마음과 자아와 육신을 통하여 삶 속에 나타날 때, 반드시 그 열매는 "밝고 환한 것"이 된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데도 내 삶과 일상이 어둡거나, 어두움에 지배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빛에서 빛이 난다. 빛에서 빛 아닌 것이 나지 않으며, 빛 아닌 것으로부터 빛이 날 수도 없다. 오직 빛은 빛으로 인한다.


만약 외부적인 현실이 그럭저럭 안락하고 평온하다면, 당연히 내 마음 역시도 안정될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삶이 안락할 때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외부현실이 어둡고 불안하고 힘들 때, 쉽게 흔들리며 그때의 평온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의 마음인지, 아니면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말미암는 영적 기쁨의 역사인지가 판가름난다. 자아의 마음은 고난 앞에 쉬이 무너지지만,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 기쁨은 오히려 시련 가운데에서 "더" 환하게 빛난다. 불가사의하고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며, 이것은 내가 직접 경험하였으므로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는 바이다.


만약 내 수준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내게서 일어났다면, 이는 곧 내 안에 그 놀라운 일을 일으키실 능력과 힘을 가지신 분이 계신다는 증거이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 기쁨도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영적 기쁨이 환하게 빛난다면, 그 말은즉 이를 가능케 하시는 근원이자 주체이신 분께서 내 안에 이미 계신다는 뜻이다. 즉, 기쁨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신다는 핵심 증거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애써 감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기쁨은 억지로 인위적으로 만들 수가 없다. 사람이 진실로 기뻐하는 것은 오직 영혼이 실제로 기쁨의 상태 안에 머무를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여서 도대체 무엇하겠는가. 내가 지금 기쁜지 기쁘지 않은지는 내 스스로 너무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진정한 기쁨은 내가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나의 영적 성장의 "결실"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구하는 자에게만 허락하시는 정당한 하늘의 상급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앙 생활에서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기쁨 없이 억지로 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 된다. 비록 그 형식을 반복함으로써 내 몸의 습관을 들인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물론 기초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겠지만, 단지 그뿐, 내 영혼의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보자. 신앙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상급"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다만 그 상급이 세속적인 것인지, 하늘의 것(영적인 것)인지가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즉 결실과 열매를 얻기 위하여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적 성장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신앙을 실천하여 행하면서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며,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고로 그 불완전성에서 비롯한 욕구와 욕망은 인간 존재의 필연이다. 다만, 그 욕구의 방향을 세속으로 돌릴지 하늘로 돌릴지, 영을 향할지 육을 향할지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열매를 얻으려면, 실질적인 성취와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기왕에 달리기 시합에 출전했으면 순위권 안에 들어야 상도 받고 보상도 얻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시합은 억지로 끌려나왔는데, 하기 싫어서 그저 느릿느릿 걷고만 있으면 언젠가 상급이 주어지는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내 시간과 비용을 통째로 내다버리는 짓이다. 뭔가를 하려면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


신앙의 동기가 두려움일 때, 그것은 의무가 되고, 의무는 속박이 된다. 그 속박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다시 반복하며 내 안에서 어두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걸레로 방바닥을 열심히 닦아봤자 어차피 더 더러워질 뿐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청소를 하지 않는 게 낫다. 무작정 노력한다고 만사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이라는 우상 숭배를 멈춰라. 노력은 "방향", 곧 올바른 의지와 함께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앙의 동기가 기쁨일 때, 기쁘므로 기도하고, 기도하니 기뻐하며, 따라서 내 안에서 기쁨은 무한히 확장되고 부풀어오른다. 내 영혼은 더욱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환하게 빛난다. 그리고 영의 차원에서 흘러넘치는 빛은 반드시 육의 차원으로 하강하여 외부현실마저도 변화시킨다.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영은 반드시 육을 통하여 현현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모든 신앙인들의 유일한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셨는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은 "본질"을 되살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형식을 부수고 깨뜨리셨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분은 율법들을 의도적으로 어기셨다. 이것은 선한 의도, 곧 율법이라는 형식이 사랑이라는 본질을 오히려 억압하고 사람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실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셨다. 따라서,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형식은 일정 부분 내려놓거나 심지어 부수어뜨려도 무방한 것이다.


사랑이 온전히 회복되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본래 연인들끼리도 사랑이 충만하면 서로 예의를 지키고, 기념일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법이다. 사랑이 있으면 율법은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 집착하면 사랑은 더욱 멀어진다. 애초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모든 율법을 능히 다 지키기는커녕 아차 하는 순간에 짓는 죄가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존재이다.


기쁨을 소중히 여겨라. 아주 작은 불씨라도 좋으니, 그 기쁨을 불어 꺼뜨리지 말고 잘 살려야 한다. 만약 형식이 그 불씨를 꺼뜨리려 한다면, 그 형식은 당장 내다 버려라. 불씨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장작을 잔뜩 쌓아봐야 불씨가 없다면 하등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나무를 통째로 씹어먹을 것도 아니고, 나무로 옷을 지어 입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먼저 기뻐하라. 자기 안에서 기쁨을 찾고, 잘 키워나가라. 그게 시작이다.




관찰이 중요하다. 남 눈치를 보지 마라. 어차피 각자의 기쁨은 제각각 다른 법이다. 나의 기쁨으로 타인의 기쁨을 가늠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불가능한 법이다. 양이 사자처럼 살지 못한다고 하여 슬퍼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양이 있다면 온 세상 모든 양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아무 소리 없이 내면으로 몰입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하라. 그게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한지 여부는 나중 문제다.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나면 그건 그때 가서 복잡하게 따져도 늦지 않다. 만약 입술을 움직여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리하라.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하나님께 친근한 말투로 기도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방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나가서 산책하면서 자연 속에서 조용히 몰입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무엇이든, 다 그리하라.


그리하면서, 내 안의 영혼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라. 특정한 방식대로 하였을 때, 영혼이 더욱 강하게 빛나는 것이 보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나만의 유일한 기쁨이다. 아, 나는 이런 순간에 더 크게 기뻐하는구나. 한 번 그것을 찾았다면, 소중히 키워나가면 된다. 그 기쁨을 유지하고 키워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기꺼이 내 삶에서 치워 없애버려라. 그 무엇도 기쁨보다 소중하지 않다.


천하를 다 가져도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초기 단계가 가장 어렵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채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과 얼어붙은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때에는, 억지로 불씨를 살려내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애쓰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아는 움직일수록 더 굳는다. 오히려, 자기를 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삶과 일상에서 정리하고 비우는 것부터 하라. 그게 무엇이든, 방해되는 것은 다 치운 채로, 그저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기도하라. 누구에게 하든, 무슨 내용으로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뭐라도 하라.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그저 나 자신을 위하여, 내 삶의 변화를 위하여 하라.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제는 내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겠다." 그 마음을 내어라. 자기 힘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라. 그러나 한두 번 하다가 그치지 말고, 꾸준히, 매일, 계속해서 시도하라.


어느 순간 불씨가 생겨날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의 권능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구하고 두드린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그때부터는 쉽다. 온 정성을 기울여서, 그 작은 불씨를 가꾸어라. 인내하고 끈기 있게 그리한다면, 그 불씨는 스스로 성장하고 자라날 것이다. 내가 통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라나서, 나를 이끌고, 내 영혼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때에 나는 무엇을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기쁨이 나를 인도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기쁨이 나를 이끌 것이다.


오해하지 마라. 감사는 해야 할 의무가 아니다.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단 말인가. 감사는 "기쁨"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작은 일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직 큰 기쁨을 맛보지 못했으므로 작은 것에서부터 우선 기쁨을 느끼기 위함이다. 오늘 숨 쉬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명령하신 게 아니다. 일단 숨 쉬는 것에서부터 기뻐하기 시작해보라는 그분의 사랑이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하겠지만, 어느 순간 정말로 아침 출근길의 상쾌한 공기가 감사하고 기쁠 날이 올 것이다.


기쁨은 온전하게 한다. 기쁨이 있을 때, 모든 일들은 그 자체로 온전하여진다. 직장 생활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직장이 문제여서가 아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어서이다.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은 상대 탓이 아니다. 내 안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이 무겁고 힘든 까닭은 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내 영혼 안에 기쁨이 없을 뿐이다. 모든 것이 다 이러하다. 그러나 내 안에 기쁨이 있을 때,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온전히 그 안에 머무르고 만족하게 되며, 나날이 행복이 더해가고, 기분 좋은 우연들과 변화들이 이어질 것이다.


감사하라. 감사하다 보면, 기쁨이 일어날 것이다. 감사는 기쁨을 일으키는 부싯돌이다. 유용하게 써야 할 도구이지, 내가 억지로 받들어야 할 상전이 아니다. 부싯돌 앞에 절한다고 해서 저절로 불이 붙을 리가 있으랴.


기쁨이 있을 때, 나의 존재와 삶은 정렬된다. 기쁨을 중심으로, 중요한 것들과 필요한 것들과 진실한 것들은 중심으로 모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과 거짓된 것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버려지고 떠나보내게 된다. 그때에 나의 존재는 성화되고, 삶은 곧 생명이 된다.




요즈음의 나는 일상 속에서 기도하는 것이 기쁘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출근하여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기도하고, 점심식사 전에 기도하고, 식사를 마치고 홀로 조용히 차 안에서 기도하고, 퇴근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기도하고, 잠들기 전에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누가 시키지 않았고, 시킨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성격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기도로 가득 채워진 나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나날이, 더욱.


신앙이 나를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행복하게 한다. 신앙의 모든 것이 나를 참으로 기쁘게 한다. 오늘은 퇴근하고 집에서 오트밀과 귀리 가루에 뜨거운 물만 부어서, 나만의 무교병을 만들어보았는데, 무척이나 기쁘고 행복했다. 물론 맛은 없었다. 누룩도 발효도 아무것도 없는, 거칠고 딱딱한 빵이었다. 오히려 맛이 없어서 더욱 행복했다. 육의 경험과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생긴 떡을 드셨고, 성찬례를 정하실 적에 그날 밤에 제자들에게 떼어주신 떡이 이러한 것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내 행복했다.


기쁨으로 말미암아 나는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할 수 있고, 차 안이 은밀한 지성소가 되며,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임재가 된다. 기쁨이 참으로 축복의 유일한 통로라는 것을 요즘 새삼 깨닫는다.


기쁨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일상 속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진실로 기도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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